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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피쉬(Banana Fish)-외로워 하는 소년 [창고/만화, 나의 오아시스]
지은이: 요시다 아키미(吉田秋生)
출판사: 소학관(小學館)/시공사
권수: 전 19권 (1984~1994)


이 작품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통신을 통해서였다. '이거 꼭 보세요, 절대 후회 안 하실 거예요'라는 숱한 찬사에 이끌려 만화방에서 조심스럽게 집어들었던 책. 그림은 처음에 '어라'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 방대한 스토리는, 그리고 이 매력덩어리 주인공이라니!! 해적판으로 완결편은 못보고 한동안 잊고 있다가 결국 라이센스로 전권이 나왔을 때 한 달 여를 고생고생하며 돈을 모아 전권을 샀고, 마지막 권에서 결국은 펑펑 울고야 말았다. 왜, 애쉬는 죽어야만 했을까. 그런데도 왜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남겨진 사람의 고통은 어떡하라고 그렇게 죽어버린 걸까.
 
같은 총을 들고 있다 해도 이 모습보다는마약 '바나나피쉬'를 둘러싼 마피아와 정부간의 권력다툼, 그 중심에는 스트리트 키즈의 보스인 애쉬 링크스가 있다. 그의 미모와 지략과 카리스마는 그의 인생을 마피아 디노 고르치네에게 속박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고, 애쉬는 어린 시절부터 유년의 따뜻한 기억이 아니라 상처와 분노뿐인 긴 터널을 지나와야 했다. 만약 하려고만 했다면, 그는 그 터널을 빠져 나올 수도 있었다. 그를 스트리트 키즈의 보스로, 남창으로, 잘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도구로, 살인마로 보지 않는 그저 평범한 '17세 소년 애쉬 링크스'로 보아주는 에이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바나나피쉬'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리고 만다. 애쉬의 이복형 그리핀이 '바나나피쉬'의 희생자였던 것은 단순한 우연일까? 결국 '바나나피쉬'는 중국과 코르시카 마피아, 미국과 중남미 정부와의 알력 다툼으로까지 확산되고 애쉬는 그 한가운데서 그들의 음모를 파헤쳐 간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는 『아키라』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캐릭터들부터 코가 약간 뭉툭하고, 예쁘고 화려한 기교보다는 현실적인 묘사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갈수록 인물들의 코는 점점 날카로워지고(필연적인가) 동세의 표현도 『아키라』에 비해서는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은 너무나 탄탄한 스토리와 긴장의 조절, 그리고 주인공 애쉬와 에이지의 교감에 있다. 굳이 애쉬와 에이지만은 아니다. 『바나나피쉬』에는 서로를 따뜻이 감싸줄 줄 아는 (방법이야 어땠든 간에)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유에룬과 신, 애쉬와 쇼터, 맥스와 애쉬, 신과 라오…. 그러나 이들은 결국 애쉬를 평범한 소년으로 보지는 못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애쉬는 경이로운 존재이며, 결코 자신들이 쫓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애쉬가 유일하게 17세로서의 자신을 꾸밈없이 보여줄 수 있었던, 어리광을 부리는 자신을 용납할 수 있었던 존재는 에이지 단 한 사람이었다. 동성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행위가 있든 없든 간에 에이지와 애쉬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는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에이지는 애쉬가 죽고 난 이후에도 그를 계속 사랑하고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신은 애쉬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자신이 덜어줄 수 없는 에이지의 고통에 가슴 아파한다. "만족하지? 넌 에이지를 영원히 차지했어"라는 신의 독백은 홀로 남겨진 에이지의 상처가 얼마 만큼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소년들의 우정, 혹은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절실한 사랑을 『바나나피쉬』의 캐릭터들은 절제된 대사와 표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작가 요시다 아키미의 능력일 것이다.


역시 이 얼굴이 더 잘생겨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장대한 스케일이지만 인물들의 개성이 결코 작품 속에 묻히지 않는다는 것이 『바나나피쉬』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구 끝까지라도 애쉬를 쫓아갈 것 같은 집념의 소유자 디노 고르치네와 자신과 닮은꼴인 애쉬에게 집착하는 리 유에룬, 애쉬가 인간적인 면모를 잃지 않게 해주었던 쇼터, 그리고 에이지의 곁에서 함께 애쉬를 추억하며 이복형의 죄값을 치르려는 신(나는 알고 있었다. 신이 커서 한 인물 하리란 것을!! >_<), 애쉬의 괴로움에 어른으로서의 죄책감을 느끼고 그를 이해하려는 맥스와 이베, 애쉬에게 인간적인 집착을 보이는 블랑카 등. 그들은 애쉬와 함께 얽혀 있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뚜렷이 드러낸다. 특히 애쉬를 동경하지만 그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데서 열등감을 느끼는 유에룬과 그런 그를 감싸주려는 신의 관계는 애쉬와 에이지의 관계의 연장선상으로도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애쉬와 에이지의 관계는 특별하다. '소중한 친구'라고 단언하기에는 그들의 감정은 너무나 깊다.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어'라는 에이지의 편지. 애쉬는 에이지 앞에서만큼은 강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었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고독, 슬픔, 외로움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17년간의 인생을 보상받는 것은 오직 에이지 앞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에이지의 편지를 읽으며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차갑게 식어간다.

거친 듯 하지만 인물의 표정들만큼은 너무나 세심하게 표현하고, 긴 이야기를 무리없이 끌어나가는 요시다 아키미의 능력엔 정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이 작가의 경우 소년들의 우정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는 듯 하다. 일련의 동성애 만화에서 서로의 감정을 행위로 표현하고 확인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요시다 아키미의 『바나나피쉬』나 『야차』, 『러버스키스』 등의 작품에서는 믿음과 의리, 감정의 공유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한다. 남겨진 자는 결국 먼저 간 자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소중한 사람의 인생의 한 자락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 사랑은 때로는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해 남은 이의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0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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