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Elizabeth)-엘리자베스의, 엘리자베스에 의한, 엘리자베스를 위한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감독: 세카르 카푸르Shekhar Kapur (1998)
주연: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제프리 러쉬Geoffrey Rush (프랜시스 월싱엄 경Sir Francis Walsingham) 조셉 파인즈Joseph Fiennes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 리처드 아텐보로Richard Attenborough (윌리엄 세실 경Sir William Cecil) 크리스토퍼 에클스턴Christopher Eccleston (노포크 공작Duke of Norfolk) 캐시 버크Kathy Burke (메리 여왕Queen Mary Tudor) 뱅상 카셀Vincent Cassel (앙주 공작Duc d'Anjou) 파니 아르당Fanny Ardant (마리 드 기즈Mary of Guise) 영화 [엘리자베스]는 사실 잘 만들어진 역사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여왕 마고]와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영화 초반부 엘리자베스가 런던탑에 유배된 때는 1554년(21세)이며 즉위한 때는 1558년, 후반부의 구교도 귀족들의 반란으로 노포크 공작을 처형한 때는 1569년이다. 결코 짧지만은 않은 15년의 시간은 엘리자베스가 볼타를 비롯한 이런저런 음악에 맞춰 춤 몇 번 추고나면 어느새 훌쩍 흘러가 버린다.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이 타임머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정도로 영화 [엘리자베스]는 많은 역사적 부분을 생략하거나 뒤틀어놓고 있으며 그 사이사이에서 진실을 찾아 하나씩 이어붙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수많은 왜곡 중에서도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대영제국의 초석을 이룬 엘리자베스 1세의 ‘이미지’를 재현해낸 것이다.어차피 영화로 만들어진 이상 약간의 허구는 어쩔 수 없기에 100% 완벽한 고증을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감독이 노린 부분이 역사적 고증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버진 퀸, 엘리자베스 1세가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이며, 이는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배우로 인해 가능했다. 더들리의 팔에 의지하여 가늘게 떨던 공주 엘리자베스, 익숙치 않은 정치와 귀족들의 알력 다툼 사이에서 고뇌하는 엘리자베스, 그리고 어느새 대담한 배짱과 카리스마, 정치적 감각으로 신하들을 휘어잡는 여왕 엘리자베스까지. 케이트 블란쳇이 아닌 엘리자베스는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원래 그곳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그녀는 16세기 어두침침한 궁정 풍경 속에 완벽히 녹아든다. 케이트 블란쳇의 엘리자베스와 함께 영화의 빈약한 서사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캐릭터는 다름아닌 제프리 러쉬가 연기한 여왕의 충복 프랜시스 월싱엄 경이다. 거의 혼자 힘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엘리자베스의 후광 뒤 어둠 속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그는 존재감이 희미한 여왕의 신하들 중 단연 돋보이는 역할이다.¹ 리처드 아텐보로의 세실 경이 왕위의 안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시어머니같은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 윌싱엄은 필요하다면 숙청을 해서라도 왕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확고한 정치적 신념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엘리자베스가 빛의 카리스마로 영화를 장악한다면 제프리 러쉬의 윌싱엄 경은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엘리자베스의 발 아래를 다져나가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의 권위와 위엄을 전혀 침범하지 않은 채 그만의 아우라를 계속 유지해나가는 것을 보고 있자면 실로 놀랍다. 월싱엄이 마리 드 기즈를 잠자리에서 암살했다는 말도 안 되는 장면마저 저도 모르게 ‘그럴 법 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이니까.² 윌싱엄 못지않게 비중있는 인물로 다루어졌어야 마땅할 로버트 더들리는 윌싱엄에 비하면 초라하기까지 하다(조셉 파인즈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 영화에서 더들리의 역할은 엘리자베스가 더 이상 남자의 품에서 휴식을 구하는 것을 거부하고 국가라는 체제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버진 퀸으로 거듭나게 하는 일종의 촉진제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더들리 본인이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거의 없다. 그는 엘리자베스라는 여인을 사랑했지만 ‘여왕인 엘리자베스’ 역시 포기할 수 없었고, 사랑을 구걸하고 변명하다시피 하며 자신의 야망을 교묘히 포장하려 하지만 그 괴리감까지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한 인물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실제 역사에서 로버트 더들리는 여왕에게 꽤 신임받았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1585년에 여왕에게서 군의 전권을 위임받아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을 정도³) 영화에서 그렇게 별볼일 없이 묘사되는 것을 보면 감독은 어지간히도 [엘리자베스]라는 타이틀에 충실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마지막 엘리자베스의 ‘버진 퀸’의 선언이 국정을 장악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더들리에 대한 배신감과 수치심에서 비롯된 반작용처럼 보이게 하는 위험 또한 내포하고 있다. 버진 퀸의 선언 이전에 더들리와의 결별이 나와야 할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다소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엉성한 서사구조와 다소 거친 연출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배우들의 호연만으로도 관객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영화다. 비록 윌싱엄 경을 제외한 다른 조연들이 얄팍하게 묘사되지만 그 얄팍함으로 인해 엘리자베스가 한결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영화 속 엘리자베스는 이 영화에서 가장 호평받을 수 있는 부분이며 주연 케이트 블란쳇은 신하들을 압도하던 여왕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관객들을 압도한다. 배우들의 성실한 연기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각본과 연출에 대한 서운함은 잠시 접어두자. 당장 내일의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던 반역자 신세에서 한 나라의 여왕으로, 그리고 세계를 호령하는 대영제국의 기틀을 잡는 엘리자베스 1세로 거듭나기까지의 험난한 과정. [엘리자베스]가 도달하고자 했던, 그러나 도달하지 못했던 부분이 세카르 카푸르의 차기작 [황금시대]에서,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해 볼 일이다.⁴ 1) 인정한다. 제프리 러쉬, 좋아하는 배우다. OTL 2) 하지만 제프리 러쉬의 윌싱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제프리 러쉬라서 부러 그런 부분을 집어넣었던 것일까? 3) 케네스 모건 엮음, 『옥스퍼드 영국사』, 도서출판 한울, 1999, 315쪽. 4) [엘리자베스]와 마찬가지로 세카르 카푸르 감독, 마이클 허스트 각본의 영화 [엘리자베스: 황금시대Elizabeth: The Golden Age]는 현재 엘리자베스 역의 케이트 블란쳇과 월터 랄레이 경의 클라이브 오웬만이 캐스팅 확정되었으며 2006년 제작 예정이다. 참조 페이지는 http://imdb.com/title/tt0414055/ 그런데 랄레이 경이 나온다면, 설마 [황금시대]도 랄레이랑 룰루랄라하는 부분에서 시작해서 랄레이 처형하는 걸로 끝나면서 버진 퀸을 재다짐한다…설마 이런 식으로 나가지는 않겠지?? (왠지 불안; 세카르 카푸르의 [밴디트 퀸]을 생각해보니 더욱 불안하다) 5) 노포크 공작을 비롯한 구교도 귀족들을 체포한 후 왜 그런 짓을 했느냐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더들리는 이렇게 대답한다. “Why? Madam, is it not perfectly plain to you? It is no easy thing to be loved by the queen. It would corrupt the soul of any man.”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생각은, 변명하지마 짜샤. -_-a; 2005. 8. 2. '창고 > 영화볼 땐 조용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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