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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그램(21g)-이 영화의 무게는?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 (2003)
주연: 숀 펜Sean Penn (폴 리버스Paul Rivers)
나오미 와츠Naomi Watts (크리스티나 펙Cristina Peck)
베네치오 델 토로Benicio Del Toro (잭 조던Jack Jordan)
샤를로트 갱스부르Charlotte Gainsbourg (메리 리버스Mary Rivers)
에디 마샌Eddie Marsan (존 목사Reverend John)
멜리사 레오Melissa Leo (마리안 조던Marianne Jordan)


여기, 죽음을 기다리는 남자가 있다. 산소호흡기를 붙들고 가쁜 숨을 고르는 남자. 그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낯선 이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죽음을 스스로 재촉하는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면서도 자신의 삶을 위해 타인이 숨을 거둘 때를 기다려야만 하는 이율배반(二律背反). 그렇기에 그는 새 생명을 잉태하고 싶다는 아내의 소원을 애써 외면하며 원래 심장의 주인을 찾아 나선다. 누군가의 생명의 원천이던 그 심장, 힘차게 생을 이어나가기 위해 고동치던 누군가의 심장이 그에게는 새로운 삶 이상의 무게를 지운 것처럼.

여기,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남편과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은 한 여자가 있다. 한때 약물 중독에 빠져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던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로 인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사롭고, 왁자지껄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 그녀는 마냥 행복해한다. 집안 가득 넘치는 아이들의 장난기어린 웃음과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오던 남편의 다감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후 그녀는 다시 약물에 기대며 또 다른 죽음을 꿈꾼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해왔던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누군가의 참혹한 죽음을.

여기, 순간의 실수로 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남자가 있다. 한때 주님의 양떼들 속에 섞이지 못했지만 먼 길을 돌아와 다시 주님 앞에 무릎꿇고 그분의 양떼 중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선량한 남자. 그러나 기나긴 방황의 끝에서 그가 구원을 청했던 하느님은 남자에게 구원의 선물인 양 트럭을 내려주시어 그 트럭으로 사람을 죽이게 만들었다. 믿었던 주님에게 배신당한, 그가 죽인 남자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귀여운 아이들의 아버지였고 그가 죽인 아이들은 누군가의 소중하기 그지없는 보물들이었다. 집에 돌아와 아내와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이 죽인 생명의 무게를 기꺼이 등에 지리라 결심한다. 고귀한 생명과 영혼의 무게에 빗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적어도 속죄와 금욕의 나날로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살아가고,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고,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기만을 갈망하는 이 세 사람은 지극히 선량한 이들이다. 아마 평탄한 인생살이 속에 그들이 서로 마주쳤더라면, 추수감사절날 함께 칠면조를 자르며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겹치고 비틀리며 새로운 궤적을 그리기 시작할 때, 그들은 우연과 필연의 틈새를 비집고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21그램]이 그려내는 그들의 조우는 시간의 순차적인 흐름을 조각조각 뒤바꾸어 이어붙이는 순간순간에 이루어지고, 이로써 단순한 복수극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는 미스터리의 포장을 한 겹 덧씌운 세련된 드라마로 재탄생된다.

그들은 ‘누군가의 목숨’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고뇌하고 괴로워하며 자성(自省)의 길고 긴 터널 속에서 울부짖는다. 지금껏 영위해오던 삶을 모조리 내던지고서 밑바닥에서 맨손으로 흙을 긁으며 생명의, 영혼의 무게에 온몸이 짓눌리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어쩌면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생명의 무게는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밖에 되갚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생명이라 하여 평생 죽음의 그림자에 얼룩질 필요는 없다. 소중한 이를 잃었다 하여 그 상실감으로 자신을 가득 채울 필요는 없다. 누군가의 생명을 실수로 앗았다 하여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또 다른 생명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은 평범한 이들이 몸으로 깨닫고 있는 결론으로 화하며 그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다. 영화 속의 폴과 크리스티나, 그리고 잭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래서일까. 절묘한 구성과 편집에서 비롯된 감흥, 그리고 숀 펜, 나오미 와츠, 베네치오 델 토로 세 사람의 연기자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의 묵직함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남아있지 않는 것은―. 그네들의 떨리는 손끝에서, 눈빛에서, 스크린 가득히 차오르는 절망 속에서도 나는 눈 몇 번을 깜박인 후 생각보다 무척 가볍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21그램, 초콜릿 바 한 개의 무게가 인간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처럼. 인간의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면, 폴과 크리스티나, 잭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후 울부짖게 만들었던 것이 바로 그 21그램이라면, [21그램]은 과연 얼마만큼의 무게를 관객들에게 지우고 싶었던 걸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달콤한 스니커즈 바의 포장을 벗기고, 왠지 모를 아쉬움에 손바닥 위에 한 입 먹다 남은 바를 올려놓고 그 무게를 어림짐작할 뿐.


꼬리>세 주연배우의 혼이 실린 듯한 연기도 매력만점이지만, 한편으로는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큰 화면에서 볼 수 있어서 무척이나 반가웠답니다. :-) 만약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흡족함을 따진다면 이 영화는 가히 1톤급의 무게로 보는 이를 압도할 수 있을 거예요.


2004. 11. 16.


2005/11/26 21:26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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