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ジョゼと虎と魚たち)-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일상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감독: 이누도 잇신犬童一心 (2003)
주연: 이케와키 치즈루池脇千鶴 (죠제ジョゼ) 츠마부키 사토시妻夫木聰 (츠네오恒夫) 우에노 주리上野樹里 (카나에香苗) 신야 에이코新屋英子 (죠제의 할머니) 시작은 정말이지 완벽한 하루였다. 아끼고 아껴두었던 휴무를 하나 까먹으며 집을 나선 토요일 아침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그야말로 가을날의 끝자락. 아침 조조로 그간 보고 싶었던 영화를 하나 보았고, 보수동에서는 못 구할 줄 알았던 만화책을 두 권 구했으며, 점심도 배불리 먹은―더없이 만족스러운 기분. 기대했던 만큼 영화는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죠제와 츠네오의 사랑이 그림처럼 그린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예상했기에 그들의 산뜻한 이별장면도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정말로 이 이상 깔끔할 수는 없을 듯한 느낌. 그런데 죠제가 혼자 먹을 생선 한 토막을 들고서 바닥으로 털썩 내려온 후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조그만 상영관 안에 가득 들어찼던 사람들이 다 나가고 크레딧마저 다 올라간 후 음악이 흘러나올 때까지 나는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연신 훔치고 코를 훌쩍였다. 휴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눈물을 참았지만 휴지나 손수건이 있었다면 그야말로 얼굴을 파묻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고향집을 떠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대학생의 츠네오의 일상은 그야말로 평범하다. 교우관계도 좋은 편이고, 섹스 파트너도 있으니 욕구불만도 그리 크지는 않은 것 같고, 나름대로 호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같은 학년의 여학생도 있다. 마작 게임방에서 꼭 손님 대타로 할 때만 국사무쌍의 패가 나온다고 투덜대는, 지극히 평온하지만 무언가를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없는 무채색의 나날들. 그런 츠네오의 일상에 난데없이 커다란 유모차가 끼어든다. 죠제. 할머니의 철통같은 보호 아래 새벽녘의 어스름 속에서만 유모차의 커다란 차양 사이로 희미한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그녀. 벽장 안에서 할머니가 주워다 준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세상의 논리가 아닌 자신만의 탑을 쌓아올리고 조그만 창문을 만드는 그녀. 불편한 다리를 끌고 손수 구운 계란말이와 생선구이 접시를 들고 털썩 바닥에 주저앉으며 밥상을 차리는 그녀. 유모차 속에서 색색의 모포를 뒤집어 쓴 죠제가 츠네오에게 칼을 휘두르는 순간, 그의 무채색 일상은 어느덧 파란 하늘의 흰 구름, 색색의 꽃들로 뒤덮인 화려한 유채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죠제에게 있어서 츠네오는 벽장 속의 스탠드 불빛 대신 밝은 햇살 아래로 그녀를 인도해준 존재이다. 읽고 싶었지만 구하지 못했던 책을 츠네오 덕분에 읽게 되고, 할머니의 약한 손으로 겨우겨우 미는 것이 아닌, 츠네오가 힘껏 밀어주는 스케이트 보드가 달린 유모차를 타고 거리를 질주한다. 직접 겪어보지는 않았어도 책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고 사랑하는가를 익히 잘 알고 있는 죠제는 처음 느껴보는 사랑과 질투를 가슴속에만 담아두다 츠네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다소 빙 둘러와야만 했지만 죠제는 그로 인해 그토록 보고파 했던 세상을 만나고 무서워했던 호랑이를 볼 용기를 얻는다. 책 속에서만 알 수 있었던 사랑, 남자, 그리고 섹스까지도. 여기까지만, 이라면 더없이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감독도,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그리고 츠네오와 죠제도 그들의 사랑이 마냥 즐거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덧 잠이 들어버린 츠네오의 곁에서 죠제는 ‘언젠가 혼자 남게 될 때’에 대한 두려움과 그럼에도 그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해와 질투를 넘어선 그리움으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 과정만큼이나 자연스럽게 헤어질 때를 알고 쿨하게 헤어진다. 그나마 위로라면 누군가가 밀어주는 유모차 안에서만 세상을 만나던 죠제가 혼자서 전동식 보조 의자를 타고 거리를 달린다는 점이랄까. 두 사람 다 서로를 정말로 사랑했고, 그렇기에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며 지난 사랑의 그림자에 짓눌려 황폐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별 후에도 변함없이 장을 보고 찬거리를 만드는 죠제처럼. 츠네오가 죠제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을 깨닫게 한 한 권의 SM책을 받아들고 길을 걸으며 그는 울음을 터뜨린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아니, 이유는 한 가지다. 나는 도망쳤다.’라는, 더없이 간단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던 명확한 사실 앞에서 츠네오는 결국 무너지고 만다. 그는 죠제를 사랑할 용기는 가능했지만 그 사랑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데 필요한 더 큰 용기와 인내는 불가능했다. 아마 츠네오가 아니라도, 평범한 20대 남자·여자라면 99% 그 누구라도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영화의 끝에서만큼은 죠제가 두 사람이 먹을 생선 두 토막을 굽기를 기대했었지만, 그들의 사랑이 지금 당장은 행복하게 끝났다 해도 세파에 찌들어버린 내 머리는 그들의 사랑의 기한이 언제까지일지를 점쳐봤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선택을 너무나 잘, 이해한다. 그리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또 다시 마냥 슬퍼진다. 영화 속에서조차 사랑이 사랑 그대로 존재할 수 없는 현실까지도. 2004. 11. 21. '창고 > 영화볼 땐 조용히'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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