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을 녹이다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more.. 맥주 위의 살얼음이 사르르 입술에 와 닿았다. 냉동고에서 한참을 얼려두었다가 바로 맥주를 따라 내주는, 쥔 손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맥주잔을 들어 눈두덩에 갖다대자 윙 울리던 귀울림이 순간 멎으며 그제야 주위 소리가 서서히 제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낮게 깔리는 음악에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드는 가운데 바 건너편 당구대에서 타앙, 공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왔다. 무질서한 소음은 아니지만 아무런 연관이 없는 각각의 소리가 한데 모여 또 하나의 새로운 음률을 만들어내는 듯한 이 기묘한 느낌은 역시 술의 힘 덕분일까. 입안을 싸아하게 적시고 목으로 넘어가는 맥주 뒷맛에 순간 졸음이 달아나는 것도 잠시, 저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쌓인 알코올 기운이 다시금 달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얼굴이 익어버린 바텐더가 웃음 반 걱정 반의 얼굴을 하고서 앞에 놓여있는 맥주잔을 살짝 밀어내고 딱 그만큼 차가운 얼음물을 가져다 놓았다. 나른한 몸을 바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그가 내 옆자리에 와 앉아 있지는 않을까. 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지금쯤이면 이제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중일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조곤조곤 전화를 하는 것을 보았으니 아마 먼저 집에 와 있을 그녀가 그의 웃옷을 받아들고 있으리라. 옷깃이며 머리칼, 몸에 잔뜩 배인 담배냄새, 술냄새, 고기냄새에 살짝 눈을 흘기는 그녀에게 그는 이마며 뺨에 입을 맞추며 어르고 달랠 것이다. 내가 눈앞에 놓인 맥주 반잔을 천천히 비우는 동안 그는 샤워를 마치고 나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면서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울 테지. ―머리 다 말리고 누우라고 해도 꼭 젖어있는 채로 누워요. 입고 있는 옷도 젖어버린다고 잔소리해도 안 고치더라고요. 까르륵 넘어가던 웃음소리 끝에 그녀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그때도 바로 이 바의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라임향이 물씬 풍겨오는 생맥주와 달콤한 카시스프라페와 팝콘 바구니를 앞에 두고서, 나란히. 그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울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그녀의 손을 매만지고 눈자위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더랬다. 밤 12시를 향해가는 늦은 시각 포 플레이의 Between the Sheets가 흘러나오자 그녀는 손뼉을 치며 예의 그 웃음소리를 사방에 흩뿌렸다. ―우와, 오랜만이야 이 곡. 왜 내가 학교 다닐 때 들어보라고 테이프 하나 떠줬었잖아. 기억 안 나? 내가 모르는 둘만의 시간. 내가 모르는 둘만의 추억. 앞으로도 영원히 알 길이 없을 둘만의 삶. 함께 앉아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은 음악을 듣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완벽히 그들과 격리되어 있었다. Sharing our love between the sheets…마치 노래가사처럼 투명한 시트로 몸을 감싼 채 사랑을 나누던 그들.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술기운을 빌려서라도 잠시나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녀가 웃음을 터뜨린 순간 고개를 돌려버렸던 것은 그 환한 웃음이 못 견딜 정도로 눈부셔서였을까, 아니면 그런 그녀에게 완벽하게 몰입해있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부러우면 결혼해 임마. 괜히 엄한 우리한테 샘내지 말고. 한없이 차가울 것만 같던 얼음잔이 그새 미지근해졌다. 거의 다 녹아버린 얼음 한 조각을 골라내어 씹으려하자 흔적도 없이 금방 녹아내렸다. 가슴속 이 터질 듯한 감정도, 이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도 입안의 얼음조각처럼 사라져버릴 수만 있다면. 녹은 얼음이 마지막 서늘한 기운을 남기며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냥, 녹아내린 얼음처럼 삼켜버리자.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형체도 없이 말라버릴 수 있도록, 그래서 여느 때처럼 그를 마주보고 웃을 수 있도록. “괜찮으세요? 얼음 더 드릴까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넘칠 것만 같은 눈을 억지로 흡뜨며 나는 웃어보였다. “네, 가득요.” -FIN. '끄적끄적 > 가끔은 내 글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05/22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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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어느 날 어느 날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지금쯤 그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어떤 펜대를 손에 쥐고 자근자근 그 끝을 씹어대고 있을지,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단박에 알 수 있는 그런 날. 토요일 아침 7시 40분. 오히려 저녁 7시 40분이라면 또 모를까, 주5일 근무제를 ‘비교적’ 준수하려고 애쓰는 회사 사무실에서 인기척을 느끼기에는 다소 어중간한 시간이지만 이미 그가 와 있음을 알 수, 아니 확신한다. 소리가 들릴세라 살짝 문을 여닫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그가 앉아있는 곳으로 향한다. 이제는 거의 희미해져가는 담배 냄새의 끝자락이 코에 와 닿는 걸 보니 아마 지금쯤 다시 담배 한대를 물고, 한손으로는 왼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오른손으로는 책상 위 어딘가에 팽개쳐뒀을 라이터를 찾아 더듬더듬하고 있을 것이다. 파티션 두 개 너머로 인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든다. 빙고. 흠칫 놀란 기색을 굳이 감추려 하는 대신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도로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만다. “미안. 흡연실까지 나가기가 귀찮아서.” 그 자신은 무척 담배를 즐기면서도 비흡연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경우엔 절대 담배를 꺼내지 않는지라 텅빈 사무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이 못내 겸연쩍은가 보다. 다시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안경을 벗어들고 양쪽 눈을 비빈다. 검은색 셔츠의 구깃한 옷주름 사이사이마다 피곤이 겹겹이 배어나오는 것만 같다. 파티션 너머로 들여다 본 그의 책상 위에는 엊그제 두어 시간의 난상토론 끝에 도로 원점으로 돌아간 기획서와 시안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다. 남들보다 두어 시간을 일찍 나와서 열심히 고쳐본들 결국 윗선의 누군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라치면 바로 너덜너덜 난도질되어 되돌려질 터인데. “어차피 수정은 월요일 오후는 되어야 가능하잖겠어? 토요일 아침부터 이럴 건 없잖아.” 어제도 제일 마지막으로 카드 긋고 나갔으면서. 보나마나 아침에 사약같은 블랙커피 한 사발만 겨우 들이키고 나왔을 거면서. 요 몇 주 동안 계속 옳게 휴일 챙겨 쉬지도 못했으면서. 그런 당신 때문에 나 역시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쉬어본 기억이 까마득한데. 계속 툭툭 튀어나오는 말, 말, 말들을 억지로 삼킨다. 제대로 깎지 않은 수염 때문에 한층 더 까슬해보이는 얄따란 뺨이 그저 안쓰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손끝만 빤히 바라볼 뿐이다. 남들 눈에 뜨일까봐 제대로 한번 잡아보지도 못하고, 만원인 엘리베이터 안에서 바짝 둥글게 깎은 손톱 끝만 슬쩍 스쳐 보냈던. “그래도 오늘 좀 일찍 나와서 고생하면,” 굵은 마디마디 긴 손가락들이 천천히 내 손목을 감싸 쥐고, “내일은, 널 볼 수 있으니까.” 맥박이 뛰는 바로 그곳에 그가 입술을 가져다댄다. 피로와 건조한 날씨 때문에 부르트다 못해 군데군데 핏자국이 말라붙은 입술로 그는 그동안의 사죄를 몰아서 청한다. 메마른 피부 위로 열꽃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그런 날이 있다. 이런 그의 사죄를 말없이 받아들이고 되돌려주어야만 하는 그런 날이. 대충 어림잡아도 석달만의 만남을 가지게 되는 날의 전일이라면 더더욱. 여린 입술 위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그 입에 담았던 미안함을 고스란히 넘겨받는다. 만약 금요일이었다면 아무 망설임없이 TGIF를 외칠 수 있었겠지만 오늘은 토요일 아침, 8시를 향해가는 시각. 그래도 좋다. 오늘이 지나면 마음껏 당신을 안아볼 수 있으니까. 마음껏 그 지친 어깨를 다독여줄 수가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슬몃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그 어느 날의 아침. FIN. '끄적끄적 > 가끔은 내 글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8/02/2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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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떤 대화 [끄적끄적/가끔은 내 글도][단편] 어떤 대화 “하지 마.” 에어콘을 켜려고 베드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리모콘을 향해 손을 뻗는 그녀에게 그가 말했다. “왜? 덥잖아.” “그냥 둬. 이게 좋아.” 들어도 못 들은 척 다시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팔을 붙잡고 그는 땀 한 방울이 또르륵 굴러 내리는 그녀의 가슴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쿡, 하고 그녀가 낮은 웃음을 터뜨리자 그 울림이 고스란히 뺨을 타고 전해져왔다. 불과 20여분 전만 해도 막 샤워를 끝내고 몸에 걸친 실크슬립이 스르륵 미끄러질 정도로 매끈하니 은은한 향내를 풍기고 있던 그녀의 몸은 질펀한 정사 끝의 끈적한 땀과 타액과 체액에 젖어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그런 그녀의 몸을 더 좋아했다. 이게, 진짜 당신이니까. 오직 이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당신. 한 손에 들어찰 정도로 알맞게 부푼 가슴부터 탄탄한 아랫배까지 입술로 천천히 훑어내리며 체취의 진향을 가득 들이마셨다. 달려들 듯이 다가오는 강렬한 탑노트는 ―당연한 일이지만― 서로의 땀냄새와 체액 냄새. 미들노트는 각종 허브향이 어우러진 샤워젤 냄새. 그리고 베이스노트는 ―비록 숨이 멎을 정도로 깊숙이 들이마셔야 겨우 눈치 챌 수 있었지만― 여리디 여린 찻잎의 은근한 향이었다. 하얀 대리석 욕조에 찻잎 물이 들든 말든 간에 뜨거운 물에 그 비싼 찻잎을 아낌없이 흩뿌리고는 몇십 분이고 찰방거리며 망중한을 즐기는 것이 그녀의 호사스런 취미였던 까닭이다. 위스키 원액을 단숨에 털어넣은 것처럼 목안이 화악 타올랐다. 견딜 수 없는 갈증에 그는 지금까지 내려왔던 흔적을 성급히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크림색 갓을 씌운 조그만 미등 하나만이 켜져 있는 어슴푸레한 방안에서도 가늘게 뻗은 쇄골이며 둥긋한 가슴이 빚어내는 굴곡은 그녀의 몸에 꼭 그만큼의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번씩 몸을 뒤챌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림자의 자취를 좇아 그는 정신없이 입술을 눌러대었다. 늘 이런 식이다. 나른한 여운이나 감미로운 후희겠거니 하고 넘겨버리기엔 그의 눈은 너무도 원색적이어서 이번에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키스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저, 어린아이처럼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매달릴 뿐. 붙잡아 두겠다거나 함께 있고 싶다거나 하는 말은 단 한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는 그가 유일하게 그녀에게 집착하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원래대로라면 이것도 반칙이지만. 보일 듯 말 듯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그의 짧은 더벅머리를 갈퀴손으로 빗어 내렸다. 한참을 가슴팍에 뺨을 부비고 있던 그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내일 모레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이건만 이럴 때의 그의 얼굴은 열 몇 살 먹었음직한, 한창 천진난만한 개구쟁이 소년의 그것이다. 그러나 표정과는 딴판으로 곧게 뻗은 척추에서 꼬리뼈를 지나 탄력있는 둔부 쪽으로 거침없이 내려가는 와중에도 몸 속 스위치를 잘도 하나씩 눌러 켜는 것을 잊지 않는 그의 뜨거운 두 손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괴리감은 이내 짜릿한 전기신호로 돌변해 손끝 발끝으로 치닫는다. 그녀는 다시 한번 숨을 삼키며 다리를 그러모았다. 만약 다른 여자 앞에서 이런 얼굴을 하고 이런 손으로 그 여자 몸을 만지면, 할퀴어버릴 테야. 위험, 위험. 하마터면 입밖에 내어 말할 뻔 했다. 순간 마음을 다잡느라 손끝발끝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잘 했어.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면 돼. 스스로 대견스러운 마음에 그녀는 온몸의 긴장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또 그렇게 웃네. 쵸코(蝶子)가 그렇게 웃어?” “내가 어떻게 웃었는데?”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비틀면서 웃어. 이렇게.” ‘마음속 어딘가가 비틀린 인물’이라던 사사키의 설명을 듣긴 했지만 굳이 그런 식으로 ‘눈에 보이게’ 드러냈었던가 하는 마음에 그녀는 조금 언짢아졌다. 그렇잖아도 오늘 촬영분에서 그녀가 파악한 것과 사사키가 의도했던 것이 딱 들어맞지 않아 결국 오늘 찍었어야 할 장면을 다음으로 미루고 온 것이다. 느긋하게 늘어져있던 온몸이 다시 딱딱하게 굳으며 움츠러들었다. “왜 그래?” “아, 오늘 결국 통과 못한 장면이 있었거든.” “뭔데?” 침대 옆 의자에 슬립과 배스로브가 걸쳐져 있었지만 그녀는 의자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방 한 구석에 놓아둔 가방 쪽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 하얀 나신이 움직이는 모습이 꼭 하늘대는 꽃잎이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카메라가 있었으면 저 나른한 뒷모습에 섞인 짜증을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그는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그녀를 담아보았다. “여기, 이 부분. ‘유리같은 눈을 하고 터덜터덜 걸어온다.’” “유리같은 눈?” “응, 유리. 『개선문』의 첫 부분에서 따온 거라는데.” 1) “『개선문』? 레마르크의 소설을 말하는 건가?” “응. 읽어봤어?” “아니. 당신은?” “아주 오래전에. 이젠 기억도 안 나.” “이 부분 해석이 안 맞았던 건가?” “보통 유리같은, 이라고 하면 텅 비고 공허한 느낌이지. 책에서도 그런 뜻으로 쓰인 거고.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쵸코는 그게 아닌걸. 유리같다는 게, 외부의 것이 그대로 비쳐보이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뒤집어보면 내면의 것도 그대로 다 보여진다는 거잖아. 투명하니까.”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쵸코야?” “쵸코는 그저 텅 빈 사람은 아니야. 오히려 속에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어서 주체를 못 하는 거지. 난 도저히 그렇게밖엔 이해 못 하겠어.” “사사키는 뭐래?” “내가 너무 많이 드러낸대. 자의식 과잉이라고. 쵸코는 오직 쵸코 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내가 연기하는 쵸코는 그렇지 않다고. 원래 처음부터 비워져있어야 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쵸코는 억지로 비워낸 캐릭터라나.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갈수록 어긋나는 것 같아.” 사사키의 의견에 100% 동조할 수는 없지만 75%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이 때로는 배역을 압도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그만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겠지만 때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버려야만 하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늘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단점 아닌 단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요령도 일찌감치 몸에 익혔고 또 그렇게 잘 해온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작품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녀의 해석이 훌륭하게 어우러진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지만, 제아무리 그녀라 해도 늘 옳은 해석만 내릴 것이라는 확신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뭐라고 충고해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번 시나리오는 제대로 읽어보질 못한 터라 그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내일은 어쩔 거야?” “일단 가서 다시 얘기해봐야지. 내가 생각하는 쵸코랑, 사사키 상이 생각하는 쵸코랑 어디서부터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건지. 내가 헛짚은 거면 몰라도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맞춰봐야 하니까.” 사실 처음엔 자신의 의견을 굽힐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그와 몸을 섞는 동안 아무려면 어떠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순간적인 도피가 아닌 감정의 유기(遺棄). 그와 함께 있으면 바로 그게 가능했다. 엉킨 실로 꽁꽁 묶여 도저히 풀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들이 가위질 몇 번에 툭툭 흔적도 없이 잘려나가는 것처럼. 한없이 날선 감정 때문에 벼랑 끝에 서 있는 것만 같은 날이면 그녀는 그의 등에 있는 힘껏 손톱을 세웠고 그는 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고 대신 하얀 속살에 이를 박으며 키득거리곤 했다. 아직도 붉게 부풀어있는 손톱자국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좀처럼 가라앉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를 엎드리게 하고 그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쳤다. 탄탄한 근육 위에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무늬처럼 선연히 남아있는 몇 겹의 붉은 상흔을 입술로 적셔나가자 그의 넓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 미묘한 떨림에도 자잘한 등 근육들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오른쪽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마지막 상처자락에까지 키스로 세례를 내려준 후 그의 곁에 길게 몸을 뉘었다. 이제는 자기 차례라는 듯 그의 팔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기억나? 예전에, 당신이 피를 뒤집어쓴 채 절규하는 장면 찍은 적 있잖아.” “기억하지 그럼. 그게 왜?” “그때, 같이 있던 스태프고 동료고 뭐고 그냥 그 자리에서 당신 안고 싶었어. 그 볼썽사나웠던 흰색 블라우스랑 시퍼런 스커트 따위 죄다 찢어버리고, 그냥 그 옥상바닥에서 같이 뒹굴고 싶었어.” “저기, 그때 당신 아마 등에 칼 맞고 널브러져 있어서 날 안으려고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지 않았던가? 물론 대본상 얘기지만―.” 대답 대신 낭창한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숨쉬기가 힘겨울 정도로 세게 옥죄어왔다. 이 남자는 진심이다. 정말로 그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소년같은 눈동자에 딱 그 나이대의 남자애들이 품을 법한 욕정이 일렁거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곧 마흔 살을 목전에 두고 있다. “만약 다음에 그런 기회가 생기면, 해도 돼?” 으르렁대는 듯한 낮은 목소리. 합일의 순간에 내뱉는 짧은 신음이 맞물린 그 말에 그녀는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이 남자, 이제 목소리만으로도 그녀를 막다른 곳으로 내몰고 있었다. “응? 해도 돼?” 대답 대신 그녀는 그의 허리에 자신의 길고 늘씬한 다리를 감았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내가 먼저 당신 덮쳐줄게. 피흘리며 죽어가든 말든 상관없이.” 예의 그 개구진 미소를 떠올리며 그가 하얀 이를 드러냈다. 솜털까지 곤두선 귓불을 살짝 깨물며 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땐, 마지막 속옷 하나까지 다 찢어줄게.” “약속…한 거야….” 단발의 옅은 신음을 흘리며 그녀가 상체를 뒤틀었다. 쉼없이 몰아치는 자극에 그나마 붙들고 있던 마지막 이성 한 조각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바람에 그녀는 그가 아주 작게 중얼거린 말은 미처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FIN. 2007. 11. 24. ========================================================================================= 1) 라비크는 여인의 눈이 가로등의 불빛을 받아 유리처럼 공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E.M. 레마르크, 『개선문』, 흥신문화사, 11쪽. 2) 음…이 글에서의 ‘그’와 ‘그녀’는 이미지 모델이 있습니다. 익히 짐작하신 분도 계시겠지만요. ^^;; 어쩐지 그 두 사람이라면 이런 대화를 나눌 법도 하다는 느낌에 끄적여 보았습니다. 제게 있어 그 두 사람은 연인이라 하기엔 더 위험한 치정관계로 얽혀 있다는 느낌이어서 말입죠(쿨럭). 3) 원래 이렇게 대놓고 공개하려고 끄적인 글이 아닌데; 요즘 이래저래 팍팍해서 그렇습니다. -_-; '끄적끄적 > 가끔은 내 글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11/2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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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봉달희] 고백 [끄적끄적/그밖에]more.. “아, 참 진짜…쪼, 이제 기분 풀어라. 엉?” “이게 지금 그런 걸로 풀릴 문제야? 언제까지 그렇게 어머니한테 휘둘리면서 살 거냐고!!” “그래. 니 말 맞다. 근데 안 있나…그래도 엄만데 눈 딱 감고 등 돌리고 살 수도 없는 거 아이가.” “그럼 앞으로도 계속 어머니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그렇게 살 거야? 정작 박 선생은 어머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조아라. 니 내 사랑하재?”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니를 사랑하는 내도 내고, 우리 엄마한테 맨날 지는 내도 내 아이가. 니한테는 그 둘이가 다른 사람이가?” “…박재범.” “니 말 다 옳은 거 안다. 그래도 우짜노. 니를 사랑하고 니가 사랑하는 내도 내고, 맨날 애먹이는 우리 엄마, 그래도 엄마라고 신경 쓰이는 것도 낸데. 그래, 이제 이런 일 있으면 조 선생한테 먼저 의논하고 할게.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둘이서 머리 맞대고 같이 하자 해놓고 내 맘대로 한 내 잘못, 맞다. 내 인정한다. 그라니까 이번 한번만 용서해주라.” “…몰라, 몰라, 이젠 나도 몰랏!!” “에이, 왜 이러시나 우리 싸랑하는 올리브~.” “맨날 곤란해지면 사랑, 사랑…. 그거면 다 되는 줄 알아??” “어? 그라면 우리 올리브는 내 사랑 안 하는가? 그런 거가?” “아휴…정말 내가 못 살아!! 그래 사랑해, 사랑하니까 앞으론 제발 그런 바보짓 좀 하지 마. 알았어?” “올리브으으~~.” ―여기까지. 잠시 바람이나 쐴까 하고 올라온 옥상을 먼저 차지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엿들은 그와 그녀는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이제 내려가야 할 타이밍임을 확인한 후 다시 살며시 옥상을 빠져나왔다. 둘 다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였다. “박재범, 의왼데. 멋진 구석이 있어.” “그러게요.” 늘 장난기 가득한 박재범만 봐오던 그들은 조 선생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진지한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보고서 새삼 놀라고 있었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늘 똑 부러지게 자기 할 말은 또박또박 하던 철의 여인 조아라가 박재범 앞에서는 저렇게 물러질 수 있다는 것에도 신기해하고 있었다. 하여튼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저러는 걸 보면 정말 서로한테 딱이다 싶단 말이야…. 그러다가 문득 그들의 머릿속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혹은, 외면하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들은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 “정말??” “으응….” 안 선생님이야 그렇다 쳐도 그녀마저 아직까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누가 뭐라 해도 천하의 오지랖 99단, 옆 사람이 아무리 뜯어말려도 한번 마음먹었다 하면 죽어라 한 우물만 파는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럼 두 사람, 대체 어떻게 사귀게 된 거야? 누군가 좋아한다는 말은 했으니까 시작한 거 아냐?” “그냥…이렇다 할 고백 같은 건 없었구…. 선생님이 고백 비슷한 건 한 적 있어.” “뭐라고 하셨는데?” “음…내가 아이 못 낳을 수도 있다고 하니까, 걱정 말라고…. 선생님이 꼭 낳게 해주겠다고….” 아이고 두야, 내가 지금 30대 중반 남자와 20대 후반을 지나 이제 막 30대로 진입한 여자의 연애담을 듣고 있는 거 맞아? 세상에 무슨 사랑 고백을 애 못 낳을지도 몰라 미안하다고 하고, 애 꼭 낳게 해줄 테니 걱정말라 하고…. 좋으면 좋은 거지 거기서 애 얘기가 왜 나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데 누가 들을까 무섭다 무서워. 조아라는 두 사람밖에 없는 좁은 당직실 안을 불안스레 휘휘 둘러보았다. “먼저 말하지 그랬어?” “그게…두려워.” “에?” 진작에 다 아물고도 남았을 가슴팍의 흉터에서 묵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랑. 길거리의 그 수많은 가게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절반이 사랑에 웃고 나머지 절반이 사랑에 우는 노래들인데 그녀에게는 그 말이 참으로 어렵고 무서웠다. 입이 닳도록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같이 입에 올리며, 자신을 정말 사랑한다면 그 증거를 보여 달라고 그녀의 블라우스 옷깃을 거칠게 풀어헤치던 남자는 그녀의 흉터를 보고 흠칫 손을 멈추며 뒤로 물러섰더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허리께를 휘어잡던 남자의 손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그녀의 가슴에 보이지 않는 생채기를 깊숙이 남기고, 살갑게 속살대던 뜨거운 목소리는 얼음장으로 돌변해서는 그녀의 마음을 단숨에 얼리고 쪼개버렸다. 그저 마냥 달콤할 줄로만 알았던 사랑이라는 말이 그렇게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팔 수 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두렵게 되어버린 것은. “그냥, 나는 그래. 좋아한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편하고 좋아.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은 익숙해지면 참 좋지만…익숙해질수록 참 겁나는 말이거든.” “무슨 뜻이야, 그게?” “얘기…했던가? 나, 전에 사귀던 사람, 결혼까지 하려던 사람 있었다고.” 나이가 나이니만큼, 게다가 그 푼푼한 오지랖을 생각하면 그 흔한 연애경험 한번 없을까마는 차분한 말끝에 묻어나는 습기가 심상찮다는 느낌에 조아라는 숨을 죽이고 듣기만 했다. “그 사람이 늘 그랬어. 매일 볼 때마다 사랑한다고, 정말 하루도 잊지 않고 말했었거든.” “…좋았겠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한다던 사람도…내 가슴의 수술자국 보고는 그냥 아무 말도 않더라. 입 딱 다물고 눈 딱 감고 말더라고.” “…….” “그리고는 내 친구랑 그렇고 그렇게 되어버렸지. 다 지난 얘기야. 이젠 아무렇지도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기는 했지만 그녀의 눈빛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을 보며 조아라는 순간 마음 한 구석이 착잡해졌다. 바보야, 아무한테나 웃음주고 마음주니까 혼자서만 다치는 거야. 그렇게 남한테 퍼주기만 해서 어떻게 살아. 그렇게 순하고 착하게만 남들 대해준다고 모든 사람들이 너한테 똑같이 대해준다는 법이 어디 있어…. 평소처럼 다다다다 쏘아붙일 수도 있었지만 입가에 머금은 그 미소가 처연하기까지 해서 그만 입을 다물고 손 한번 잡아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그런가…. 난 사랑한다는 말,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이젠 조금 무서워. 예전처럼 무턱대고 용감하게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렇게나 온 마음을 담아서, 떨림을 애써 감추는 것만으로도 힘겨워 겨우 속삭일 수 있었던 그 말이,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바람결에 날려가는 모래먼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진심이 아니면 감히 입 밖에 꺼낼 수 없다고,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이라 믿었던 생각했던 그 말이 순간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한낱 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물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낱말은 옛날의 그 남자가 밥, 담배, 커피만큼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곤 하던 사랑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훨씬 무겁고, 진솔하고, 마음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말해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는 게 두려웠다. 그의 고백 앞에서 지난 일을 떠올리지 않고 순수하게 기뻐할 자신이 없었다.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 그리도 쉽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온몸으로 깨달아버렸으니까.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한다는 걸,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그러니까…난 지금 이 상태만으로도 괜찮아. 말은 안 해도 선생님이 날 얼마나 아끼는지 알고, 나도 선생님 많이 좋아하고…. 그냥 그걸로도 족해. 굳이 사랑한다는 말 안 해도 상관없어. 그런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걸.” “그런 게 어딨어? 말로 듣는 거랑 그렇지 않은 거랑은 분명히 다르잖아.” 볼멘소리로 툭 내뱉는 아라의 반문에 글쎄, 하며 그녀는 다시 한번 희미하게 웃었다. 어떻게 해야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말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영원을 약속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영원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으면서도, 예전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그 고백의 빛을 순식간에 꺼뜨릴 지도 모른다는 게 무섭다는 것을. ******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와 마주친 조아라는 꾸벅 목례를 하면서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회진이며 수술 스케줄도 끝낸 것을 확인했으니 지금은 아마 자신의 연구실로 가려는 것일 게다. 뒤따라 잽싸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는 괜히 헛기침을 하고 있으려니 그가 무슨 용무냐는 듯 슬쩍 안경 너머로 시선을 건넸다. 아…조아라, 많이 변했다. 남의 연애사에 훈수까지 두게 되다니. 이게 다 오지랖 넓은 그녀와 엮인 탓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래도 어쩌나. 가만 두면 잘 가다가도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툭 돌부리에 채어 넘어질 것만 같이 순해빠진 사슴눈을 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느새 뭐라도 하나 더 봐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안 선생님.” “―왜?” 우와, 봉하고 사귀고 나서는 좀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저 박력만큼은 여전하시단 말야. “죄송하지만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봉 선생에 관한 일입니다.” “뭔데?” 조아라가 무엇 때문에? 그는 살짝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는 말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봉 선생, 사랑하시죠? 그냥 가볍게 좋아하시는 거 아니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언제 오지랖이 법정 1군전염병으로 되었던가? 동기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렇겠거니 하고 듣고 넘기기엔 이건 좀 심하다. 그녀와의 관계를 일일이 조아라에게까지 설명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감히, 이 내가, 그녀를 대하는 마음이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그런 감정으로 보였단 말인가? 그는 안경을 재차 고쳐쓰며 조아라를 쏘아보았으나 상대방 역시 만만찮은 성격인지라 그의 시선을 지지 않고 맞받아쳐냈다. 후우…아무래도 이 친구한테는 일일이 설명해줘야 할 모양이다. “내가, 봉 선생 대하는 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나?” “모르죠. 말씀하신 적이 없으니까요.”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거잖아, 그런 건.” “봐서 알게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로 확신을 주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말’의 중요성을, 그 힘을 간과하곤 한다. 그저 속에 품고만 있으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도 말을 통해 더욱 공고해질 수 있고 그 효력의 유예를 한참은 늘려갈 수 있는 것이다. 이심전심, 심심상인, 염화시중…. 뜻이야 좋지. 그치만 말 안 해도 알면 다 부처님이고 돗자리 하나 펴고는 점쟁이라도 되게?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변해버린 그를 보며 조아라는 태어나서 처음 발휘해 본 오지랖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경험이란 걸 깨달았다. “입 밖에 내기 전까지는 그저 혼자만의 생각이고 바람일 뿐이죠. 말로 상대방에게 전달해줘야 비로소 변하지 않는 진실이 되는 게 아닐까요.” 한껏 얼굴을 찌푸린 채 허리춤에 한 손을 얹고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조아라는 숨을 한번 크게 삼키고 곧이어 세차게 몰아칠 반격을 두 눈 딱 감고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7, 8, 9, 10, 11…. 숫자판에 번갈아가며 불이 들어오는, 짧다면 짧은 몇 초 동안 내심 초조해하며 기다렸음에도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목적지에 다다른 엘리베이터가 경쾌한 딩, 소리를 내며 문이 스륵 열리고 먼저 내려야 말아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은 한 발을 내딛으려는 찰나 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조아라의 옷깃을 잡아챘다. “조아라 선생. 지금 바쁜가?” “네? 아…괘, 괜찮습니다!!” 어금니 질끈 물고 각오하고 있던 호된 반박 대신 그녀가 없을 때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앞에서 순간 놀라 입을 딱 벌리고 만 조아라를 보며, 그는 의기양양하게 다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따라와. 내 특별히 조 선생한테는 ‘눈으로’ 확인시켜 줄 테니까.” ****** “선생님!!!” 숨이 턱에 닿도록 헐떡이며 그녀가 연구실 안으로 냅다 뛰어 들어왔다. 이거야 원, 너무나 예상대로인 반응이긴 했지만 역시 저렇게 새파랗게 질린 모습은 가급적 안 볼 수 있다면 안 보는 게 좋은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그리고 그렇게 뛰어다니지 말랬지!” “선생…님, 어디, 아프신 거…아니죠? 그쵸?” “왜 그래?” “아니…조 선생이…선생님…MRI 찍으셨다고…어디 안 좋으신데 있는 거 아니냐고…” 이것 참. 좋아하면 서로 닮는다더니 박재범이나 조아라나 똑같구만. 눈치 하나 빠른 거야 나로서는 좋은 일이지만. 그는 입가로 비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냉랭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래. 하는 김에 심장초음파도 해봤어. 정상은 아닌 것 같더라. 네가 직접 한번 봐.” 그가 몇 장의 사진을 그녀 손에 쥐어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받아들고는 한참 바라보던 그녀가 채 떨림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선생님…모르겠어요…. 어디가 이상한 건지…아이 참…돌대가리라서 그런가…. 다 괜찮은데…빨리 말해봐요 선생님,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다그치듯이 몰아붙이는 그녀의 물음에 그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좀 지난 일이긴 했지만 그녀 때문에 혼자 속절없이 끙끙 앓았던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 여유야 어떠랴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여유도 잠시, 그녀는 그예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고, 놀란 그가 그녀를 황급히 안아 일으켜 세웠지만 결국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훌쩍)모르겠(딸꾹)어요…어쩜 좋아….(딸꾹) 다 정상인(딸꾹) 것 같은데…뭐예요, 네?(훌쩍).” 눈물, 콧물도 모자라 딸꾹질까지 해가며 매달리는 그녀 앞에서 그는 순간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 이제 장난도 한번 제대로 못 치겠구나. 아무리 가벼운 장난이라도 그녀 눈물 한 방울에 정말 멀쩡하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으니…. 금세 흠뻑 젖은 얼굴을 재차 쓰다듬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입술로 훔쳐내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품에 안고 토닥였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겨우 울음을 그치고 세차게 들썩이던 그녀의 어깨가 그나마 조금 가라앉는 듯 싶자 그는 다시 사진을 보여주며 조용히 말했다. “잘 봐…한참 들여다보면 보일 거야. 안중근 심장이 봉달희 거라고…. 안중근 머릿속에 봉달희 밖에 없다고….” 그녀가 여전히 눈물이 고인 두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그의 말을 채 다 이해를 못 한 듯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젖은 눈자위와 하얀 뺨과 도톰한 아랫입술에 차례차례, 경건한 마음으로 입맞춤하며 그는 지금껏 아끼고 아껴두었던 그 한 마디를, 언젠가는 꼭 해주리라 생각하며 묻어놓았던 그 말을,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상대가 그녀임에 감사하며 속삭였다. “그래. 나 안중근이, 너 봉달희를, 사랑한다고….” 그녀의 생각이 맞았다. 애써 잊을 수 있을 거라 그토록 마음을 다잡았건만 그녀의 머릿속에는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그 남자의 가볍기 그지없었던 사랑고백이 생생히 떠올랐다. 거칠게 옷 안을 헤집다가도 흉터 자국 위에서는 흠칫 멈춰버리던 손, 마음이 아닌 금방 소모될 욕구를 위한 메마른 고백에 서걱서걱 베여지던 상처를 속절없이 혼자 끌어안아야만 했던 숱한 밤들이 하나 둘씩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결국은…생각이 나버리는구나.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 그의 고백을 듣고서야 그녀는 진심어린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만큼의 무게를 지니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눈물이 가시지 않은 자신의 눈을 걱정스레 들여다보는 그의 까만 두 눈과, 섬세한 크리스탈을 어루만지듯 얼굴을 부드러이 감싸고 있다 다시금 목덜미로 내려가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는 그의 따스한 손과, 다시는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자신의 품안에 끌어안고 있는 강인한 팔과, 그녀 가슴속의 시계소리와 함께 박자를 이루며 뛰고 있는 그의 힘찬 심장 고동. 그 모든 것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 해묵은 상처 위에 하나씩 내려앉으며 마지막 얼음 한 조각까지 모두 녹여내었고, 다시 두 뺨 위로 반짝이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옛날의 그 남자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그 남자 때문에 흘린 눈물이 수십 바가지고 무색이라 영원하다던 그 잘난 우정마저도 단숨에 박살이 나버렸지만, 어찌 되었건 그 남자 덕분에 진짜 사랑이 어떻게 다가와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으니까. 진심어린 고백은, 그토록 잊고 싶었지만 앙금처럼 가라앉아 딱딱하게 굳어버린 기억 위에 촉촉한 봄비처럼 스며들어 온 마음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어루만지는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지금이라면 그녀도 얘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동안 숱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바보같이 옛일에 얽매여 전하지 못 하고 속으로만 삼키던 그 말을. “그냥…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냥…내 안에, 선생님으로 가득 차버려서…아무 생각도 안 나요….” 그래, 이제는 그 어느 것에도 내어줄 틈이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로 가득 차버려서 도저히 입 밖에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 “저도요…. 저 봉달희가, 안중근 선생님, 사랑한다고….” 그래서일까, 그녀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다. 지난 시간은 쓰디쓴 추억과 아픔만 남긴 게 아니라 그녀가 진짜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심안(心眼)과, 다시금 영원을 꿈꿀 수 있는 용기를 주었으니까. 함께 이마를 맞대고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 짧은 한 마디를 가득 담게 되었으니까. 화악 더워져오는 가슴, 깊게 얽혀드는 시선, 깃털같이 살풋 내려앉는 입맞춤, 주고받는 호흡―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그녀가 그에게 기꺼이 자신을 묶어두기 위한 영원의 주문을. “사랑해.” “…사랑해요.” FIN. =============================================================================== 1.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올린 단편들 중 ‘아침식사’를 제외하고는 다 제목이 두 글자씩 되버렸는데 딱히 의도한 건 아님. (이참에 ‘아침식사’ 제목도 ‘조식’이라고 바꿔버릴까.) 2. 사실 드라마나 영화니까 ‘사랑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실제 현실에서는 그게 어디 쉬운가? 입에 잘 익지도 않고, 뭐랄까 ‘좋아한다’라는 말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니까. (게다가 안쌤이 연애에 있어서는 좀 많이 이젠 정말로 밑천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달달한 거 쓰래도 못 하겠다. 어차피 달달은 나하고는 거리가 먼 단어라. -_-; 3. 말은, 중요하지. 그럼. (디시 봉갤 업로드 시간 : 2007-06-11 09:52:00, Estel) '끄적끄적 > 그밖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7/06/1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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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봉달희] 악몽-reverse ver. [끄적끄적/그밖에][외과의사 봉달희] 악몽-reverse ver. 또, 그가 탄식과도 같은 낮은 한숨을 내뱉는다. 그녀는 눈을 계속 감은 채 그의 기척을 느낀다. 곁에서 잠들어 있는 ―그는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깨울까 꼼짝도 하지 않고 그는 먼저 눈으로 그녀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런 다음에야 시트 위로 드러난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쓸어보고 뺨 언저리를 매만지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을 하나하나 만져본다. 또 다시 새어나오는 한숨. 아까와는 다른, 이번에는 그녀가 있음에 안심하는 한숨이다. 함께 밤을 보내는 날이 잦아지면서 그녀는 그에 대해서 지금까지 몰랐던 것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잠들 때엔 아무리 바른 자세로 누웠어도 일어날 때 보면 늘 그녀를 향해 모로 누워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는 것. 무슨 꿈을 꾸는지 한 번씩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에서 깨곤 한다는 것. 어떨 땐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이 나직한 신음소리를 흘릴 때도 있다는 것.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살짝 달싹인다는 것. 그리고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잠들어 있는 그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는 것. 그러다 잠에서 깬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 강인한 팔로 그녀를 꼭 끌어안는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파아란 핏줄이 비쳐 보이는 희디 흰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짚어 맥박을 확인하고, 단아(端雅)한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양 토닥토닥 그녀의 등을 두드린다. 그녀는 안다. 그의 그런 몸짓에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과 절박함이 섞여 있다는 것을. 부러 눈을 뜨지 않고 그녀는 잠에 취한 척 품속을 파고들어 그의 심장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은 빠른, 조금은 흐트러진 심장고동. 그래서 그녀는 그가 또 악몽을 꾸었음을 짐작한다. 가만히 그의 맨가슴에 자신의 손을 얹고 그의 맥박이 진정되기를 기다린다. 잠꼬대를 하는 척 그를 불러보기도 한다. 나, 옆에 있어요. 내 목소리 들어봐요. 들리죠? 그러니 이제 돌아와요…. 그러면 그는 그녀의 하얀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다시 눈을 감는다. 이제 그녀는 안다. 병원에서 하늘색 수술복에 흰 가운을 걸치고 환자들을 대하는 그는 누구도 거칠 것 없이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는 의사이지만, 지금 곁에서 온몸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는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깊은 외로움을 피하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술을 깨무는 남자라는 것을. 비록 그가 지닌 것과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녀도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안다. 이를테면, 혼자 스탠드에 우두커니 앉아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친구들을 그저 바라봐야만 했던 것. 우르르 뛰어가는 친구들을 쫓아 뛰어가다가 죄어드는 가슴을 움켜쥔 채 점점 멀어져서 아이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훔쳐야만 했던 것. 늘 조금만 더, 하는 순간에 그예 닥쳐오고야 마는 통증에 이를 악물고 있다가 그나마 손안에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제 손으로 놓아버려야만 했던 것. 경멸이 섞인 비웃음을 뒤로 하고 돌아서서 이제는 몇 번째인지조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익숙해져버린 실패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헤헤 웃는 것밖에 없었던 것. 웃고 있다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웃음 한번을 위해 피가 맺힐 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어야 했다는 걸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얘기할 사람이 없었던 것뿐이다. 아픈 심장도, 그 때문에 억지로 단념해야 하는 것들도, 그 때문에 속절없이 잃어야만 하는 것들도 모두 그녀 혼자만의 몫이었다. 누구도 그 몫을 함께 질 테니 조금이라도 나누어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은 결국은 모두 그녀를 부정하고 떠나갔다. 그래서 그녀는 그 모든 걸 그저 처음부터 자기 몫이 아니었던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믿음도, 사랑도, 그나마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했던 우정마저도.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혼자 있는 그의 뒷모습이 그렇게나 익숙해보였던 것은. 처음에는 순수한 동경이었다. 수술실에서, 환자 앞에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히 의사인 그를 선망하고 언젠가는 그의 실력을 따라잡을 수 있기를 애타게 바라는 마음에, 하나라도 더 묻고 더 배우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눈으로 좇기 시작했다. 죽어라 버티고 또 버텼지만 결국은 내주어야만 했던,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던 자리에 눈치를 살피며 몰래 한 발을 딛고 서 있는 것만이 고작이었던 그녀에게 그는 비록 야멸치게, 인정사정없이 몰아치고 때로는 눈물 콧물을 쏙 빼게 만들긴 했지만 조금씩 그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찾고 자신이 의사임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었다. 그뿐이었다면, 그녀는 아마 언제까지고 그를 경외심을 담은 눈빛으로만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때로는 그의 면박에 얼굴을 붉히고 눈물도 깨나 흘리긴 했겠지만 지금까지 그러했듯 다시 헤헤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종종거렸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 굳은 표정으로 돌아서던 쓸쓸한 등. 외로움과 슬픔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던 눈동자. 저도 모르게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감추기 위해 애써 매몰찬 말만 골라 내뱉으며 먼저 등을 돌릴 때 팔락이던 그의 하얀 가운자락에서 묻어나오던 고독. 한없이 시리기만 하던 그 뒷모습. 혼자 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병상련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곁에 있어주어야 한다 생각했다. 홀로 외로움을 삼켜야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잘 알기에, 누구라도 그저 말없이 손 한번 잡아주는 이가 있었음 하고 그토록 바랐던 예전의 자신을 알기에, 누구든지 저 굳은 어깨를 녹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에, 목마른 사람이 절로 물을 찾는 것처럼 어느새 그녀는 눈이 아닌 마음으로 그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를 향한 감정이 단순한 동경이나 동정이 아닌, 저도 모르는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간절한 갈망으로 나아가버렸다는 것을. 꿈을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힘겹기만 한 자신의 심장이, 이제는 그라는 존재까지 가득 담아버렸다는 것을. 언제 어떻게 배신할지 모르는 심장을 껴안고서도 결국 포기할 수 없었던 꿈처럼, 그녀는 또 다시 사랑을 소망한다. 그녀가 자신의 20년 꿈을 담보로 내걸고 그가 그녀의 가슴을 열었던 날, 그는 두 개의 기계판막과 함께 그의 바람과 꿈을 같이 그녀의 가슴에 담았다. 때로는 조금만 부딪쳐도 푸릇푸릇한 얼룩으로 선명히 떠오르는 멍 자국에,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기만 한 얼굴에, 부석부석 부어오르는 손발에 그의 깊은 눈이 순간 흔들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기에 감당해야 하는 그의 몫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품고 있던 탓에 이제는 뼛속까지 스며들어버린 고독을 다 떨쳐낼 수 없어 꿈속에서마저 외로움에 진저리치는 그를 바라보며, 자신의 약하디 약한 심장이 그를 더한 악몽 속으로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괴로울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그를 사랑하기에 견뎌야 하는 그녀의 몫이다. 지금까지 갖고 싶은 것들을 단념하기 위해 살아온 그에게, 갖고 싶은 것들을 어쩔 수 없이 단념해야만 했던 그녀에게 더 이상은 놓칠 수 없는 것이 생겼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것들을 포기했어야 했던 거라면 그래, 얼마든지 예전으로 되돌아가 몇 번이고 잃어주고 무릎을 꿇어주마. 그의 존재, 그녀의 꿈, 그녀의 생명, 그리고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그는 그녀의 꿈을 인도하고, 그녀는 한없이 어둡기만 한 고독의 터널 끝에서 그의 손을 잡기 위해 기다린다. 그렇게 그들의 꿈과 사랑은 그 궤도를 같이 한다. “같이 가요….” 어둠 그 깊은 곳에서 파르르 떨고 있던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잠꼬대인 양 그녀는 암흑 너머 여명 속으로 그의 손을 잡아 이끈다. 자신을 더욱 세게 감싸 안는 그의 품속에서 그녀는 이제 그가 두려움 대신 희망을 품게 되었음을 안다. 이제 괜찮아요. 선생님이 살려준 심장이에요. 언제 어디서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기다리고 있던 절망과 외로움에 더 이상 붙들리지 않을 거예요. 두 개의 기계판막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선생님이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내 꿈의 끝에 선생님이 서 있는 것처럼, 선생님의 외로움이 끝나는 곳에 내가 서 있을 테니까. 내 가슴속 시계소리가 그토록 쉬지 않고 째깍거리며 울리는 이유는, 어둠 속에서 선생님이 나를 찾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니까. 그러니, 내게로 와요. FIN. (디시 봉갤 업로드시간: 2007-05-28 08:59:53, Estel) ([외과의사 봉달희] 악몽의 다른 버전입니다.) '끄적끄적 > 그밖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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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봉달희] 선물 [끄적끄적/그밖에][외과의사 봉달희] 선물 선물(膳物) 남에게 어떤 물건 따위를 선사함, 혹은 그 물건. 아이큐 185를 자랑하는 천재외과의사, 한국대병원 TS의 정신적 지주인 그의 머릿속에 입력된 선물의 뜻은 저렇게 몇 개의 낱말로 명쾌하게 설명될 수 있었지만 막상 그 뜻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 필요한 사례는 단 하나도 입력된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아는 선물이라 해봤자 매년 설이나 추석 등 명절,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같은 특정 시기에 들어오는 학용품, 축구공, 그리고 짧으면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이면 질려버릴 조잡한 장난감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뭐 없으면 없는 대로 아쉬운 물건들이니 들어오는 대로 주섬주섬 챙겨 동생들 머릿수대로 나누어주기는 했지만 이제껏 선물이란 건 그에게 위의 사전적 정의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사긴 샀어? 반지?” “그게 말이지, 영 어렵더라고. 일단 우리 쪼 손가락 사이즈도 내가 잘 모르고…민우 형도 알지 않나. 올리브 취향 고상한 거. 내 눈에 이뻐 보이는 거 샀다가 마음에 안 들면 그건 그것대로 또 곤란하잖아.” “그렇긴 한데…평소 때라면 그냥 간단한 거 선물해도 되지만 명색이 1주년 기념인데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게 좋지 않겠어?” “아이고 마 모르겠다. 정 안 되면 딱 깨놓고 물어봐야지. 우리 올리브, 속옷 무슨 색깔 좋아하노? 귀찮게시리 빨래 안 해도 되게 속옷 한달치 사주면 안 될까?” “설마 진짜로 물어볼 건 아니지? 아서라 아서!” “나도 내 목숨 귀한 줄은 알거든요?” 한동안 화장실을 쩌렁쩌렁 울리며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나간 후에야 그는 살며시 문을 열고 나와 손을 씻었다. 세면대 위에 올려진 비누를 문질러 꼼꼼하게 거품을 내어 손을 씻으며 그는 아까 엿들은(굳이 그럴 의도로 들은 건 아니지만 뭐 결과로 보면 엿들은 셈이니까) 대화를 계속 곱씹고 있었다. 그런가, 1주년 기념으로 선물을 한단 말이지. 잠깐, 박재범이 1주년 운운한단 얘기는 우리도 그쯤 된다는 거 아냐?? 하지만 언제부터 사귄 거라고 해야 하지? 둘이서 처음 영화 보러 갔다가 재수없게 저 박재범하고 딱 마주쳤던 날? 굳이 따지자면 그날이 맞긴 하지만…. 정말 그날을 기념일로 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그와 그녀가 100일이니 200일이니 하는 걸 한 번도 챙겨보지 않았다는 것, 설령 그날을 시작으로 한다 해도 이미 1주년을 기념할 날짜는 넘겨버린 후라는 데 있었다. 아차…그런 것도 챙겼어야 했던 건가! 평균 수치를 훨씬 뛰어넘어 천재의 범주에 들어가고도 남는 그의 두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연애의 장벽 앞에서 공부나 일과는 또 다른 좌절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학부 시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레지던트 시절 겪었던 두어 번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소박한 연애 경험을 돌이켜보았을 때 이런저런 기념일을 곰살맞게 챙겨주지 않는다며 상대방이 그에게 길길이 화를 내었던 것도 같다. 뒤늦게 챙긴답시고 꽃다발을 사다줬지만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들었었지 아마…? 비록 까맣게 잊고 있었긴 했지만, 그때에도 딱히 선물이랍시고 무언가를 주어본 적은 없었다. 그나마 선물을 한 경험이라곤 같은 고아원의 여동생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 멋 좀 부리라고 몇 번 구두나 가방을 사준 게 전부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여대생이 갖추어야 할 일종의 생필품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었다. 요컨대 여자들이 뭘 선물로 받으면 좋아할지, 특히 좋아하는 여자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셈이다. 그럼 대체 뭘 줘야 한단 말이야? 생각해보니 그는 그녀에게도 딱히 선물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좋아하는 초밥 도시락이며 간식거리는 때맞춰 사다가 늘 챙겨주곤 했지만 그걸 선물이라고 하기엔 좀 곤란하지 않은가. 비록 그녀는 좋아라하며 소리도 경쾌하게 짝, 하고 나무젓가락을 쪼개고는 신나게 도시락을 비우고 장국 국물을 훌훌 마셔대며 ‘진짜 마이어요(우물우물)!!’라고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녀 먹으라고 사다준 먹을거리 중 절반은 단짝이랍시고 같이들 붙어 다니는 그녀의 동기들 입 안으로 들어가 그네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니 딱히 그녀만을 위한 것도 아닌 셈이다. 선물을 줄 때는 기왕이면 받는 사람이 가장 기뻐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것을 주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는 그녀가 무엇을 받아야 가장 좋아할지를 몰랐다. 전복죽을 사다줘도 좋아했고 족발도 좋아했고 초밥이라면 환장을 했으며 간간이 챙겨봐야 하는 논문이나 자료들을 추려서 중요한 부분만을 정리해서 뽑아주면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두 눈을 번쩍이며 잽싸게 받아드는 그녀였다. 받을 때 표정이나 웃음, 몸짓의 정도를 생각했을 때 굳이 순위를 따지자면 초밥이 가장 위였던 거 같은데…. 좋아하는 여자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좋은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아이큐와는 전혀 관계없이 직접 쌓은 경험과 그에 따른 시행착오만이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이런 경험이나 시행착오를 겪어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한국대병원 TS 천재외과의의 두뇌는 어렵지 않게 추론해 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했을 때 가장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도. 그러나 맙소사, 그 질문을 꼭 그 사람에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서울에 있는 것도 아닌, 태평양 건너 저 미국에 있는 이건욱에게 국제전화를 걸면서까지?? 전화기 너머에서 수화기를 손으로 막을 생각도 않고 집안이 떠나가라 웃어댈 모습이 안 봐도 비디오일 정도로 눈앞에 훤했다. 어쩌면 아문 지 한참은 된 수술자국이 다시 터질 지도 모를 일이다. 젠장,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해!! 그럼 대체 누구에게? 마치 어려운 수술을 앞두고 환자들의 EMR을 다시 처음부터 체크할 때처럼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지고 가지런한 양눈썹 사이로 내 천자가 그려졌지만 어차피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결자해지(結者解之),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하는 법이다. 이 경우엔 ‘묶은 사람’은 ‘제가 언제요!!’라고 펄쩍 뛸 테지만. ****** “부르셨습니까.”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쭈뼛거리며 박재범이 그의 연구실 문 틈새로 빼꼼 얼굴을 디밀었다. 나 참, 누구 잡아먹으려고 부른 줄 아나…. “그래. 좀 앉지.” “아, 예.” 소파 한 구석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는 품새가 영 거슬렸지만 그것까지 지적했다가는 기껏 여기까지 부른 보람이 없어질까 싶어 그는 두 말 않고 작은 냉장고에서 드링크 한 병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고개를 한번 꾸벅하며 그의 눈치를 슬쩍 살핀 박재범이 드링크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아하니 뭔가 야단칠 일이 있어 부른 것은 아닌 듯 했다. 하긴 그럴 일이라면 굳이 연구실로 부를 것도 없을 것이고 게다가 자신은 GS 소속이 아닌가. 굳이 부르려면 TS인 이민우가 불려올 가능성이 더 높을 텐데 당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선물은 샀나?” “―풋!!” 오랜 시간 단련한 외과의의 날카로운 감각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질문에 입안에 머금었던 음료수를 단숨에 뿜어내버린 박재범을 노려보며 그는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저, 선생님…혹시 화장실에서….” “그래, 들었어. 그래서 묻는 거야. 뭐 샀어?” 하여튼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딱 그 짝이구만!! 내 다시는 화장실에서 입 벙긋 하나 봐라!! “반지는 꼈다 뺐다 하다가 잊어버릴 거 같아서 그냥 목걸이 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 팔짱을 끼며 굳게 입을 다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박재범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비록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네북 신세이기는 하지만 명색이 그도 의대 6년을 무사히 졸업한 한국대병원 외과 레지던트가 아니던가. 적어도 그가 이민우가 아닌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를 짐작할 정도의 머리와 눈치는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선생님, 봉 선생한테 뭐 선물 하실라고요?” “크흠!” 형세역전. 박재범은 한결 느긋한 마음이 되어 다리를 쭈욱 폈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TS의 안중근 선생이 애인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바로 이 박재범에게! 그러나 들뜬 것도 잠시 대류권을 돌파해서 성층권계면까지 도달했던 기분은 곧바로 지상을 향해 수직낙하를 시작했다. 내 코도 석자인데 이 상황에 누굴 돕는단 말인가. 그것도 저 안중근 선생을? “흠흠…. 뭐 여자들에게 선물할 수 있는 게 뻔하지 않겠습니까. 반지나, 향수나…. 그런데 선생님, 혹시 봉 선생한테 제일 처음 뭐 주셨습니까?” “처음?” “예, 처음에요. 왜 좋아하고 사귀게 되면 뭐라도 막 주고 싶잖습니까? 처음에 뭐 주셨는데요?” 뭐라도 막 주고 싶다라. 그러고 보니 그걸 줬었지, 참. 그런데 이걸 꼭 말해야 해? 그것도 저 박재범한테? “…스.” “예에? 뭐라꼬요?” 그가 믿거나말거나 자신의 양심을 걸고 맹세컨대(그가 박재범의 양심을 신뢰하는가, 라는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박재범은 결코 그의 말을 일부러 못 들은 척 하고 반문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못 알아들었을 뿐이다. 설마하니 주스 한 병으로 선물을 때웠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그것도 천하의 안중근이! “주스, 오렌지주스 줬어. 그게 왜!!” “…….” 봉 선생. 내 진짜 봉이 여동생 같아서 하는 얘긴데, 니 안 선생님하고 사귀는 거 함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라. 세 살 먹은 아도 아이고 세상에 주스가 뭐고 주스가!! 지나가던 개…는 좀 너무하고 그래, 초딩들이 웃겠다!! 그저 헤헤거리며 예의 그 사람좋은 웃음을 달고 사는 그녀에게도 이런 말 못한 고민이 있었다니…. 이 순간 박재범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진지하게 염려하고 있었다. 이젠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위해서라도 진지하게 질문에 응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박재범이었다. “혹시 그…주스 말고는 뭐 또 주신 거 없습니까? 아, 초밥이나 족발 이런 거 말고 말입니다.” 째릿. 그의 눈이 순간 레이저빔이라도 된 듯 박재범의 얼굴에 작렬했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최신 학회 자료랑 논문 요점 추려서 매번 챙겨줬어. 얼마 전엔 심초음파학회 워크샵 자료도….” 아, 그런 선물이라면 저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박재범은 찬찬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하늘같은 스태프라고는 하지만 1년 365일 병원에서 함께 부대끼는 사이인데다 그녀와 그렇고 그런 사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좀 더 유심히 지켜보게 되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새삼 다시 알게 된 것은 일생에 있어 정말로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배이며 비록 후배들을 닦달하고 몰아세우기 일쑤지만 환자들 앞에서만큼은 한껏 날을 세웠던 자신을 누그러뜨릴 줄 아는, 한 사람의 의사로서 정말로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그녀 앞에서는 그저 지극히 평범한, 한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라는 것이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아는 법이다. 조금 서툴고 방향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박재범이 보아온 그는 적어도 자기가 아는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마주 앉아 있는 그는 수술실에서 거침없이 메스를 휘두르던 천재의사가 아니라, 그저 어떻게 하면 그녀를 좀 더 기쁘게 해줄지 몰라 고민하는, 환자 앞에서뿐만 아니라 사랑 앞에서도 진심을 다하기 위해 고민하는 남자였다. 그래, 내 아까 한 말 취소다 봉. 좋겠다. 이런 사람에게 사랑받아서. 잘 됐구나. 이런 사람을 사랑하게 돼서. “선생님, 외람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해봐.” “보통 여자들한테 선물은 반지나 목걸이도 많이 하고요, 100일이니 200일이니 마다 꽃다발도 챙겨주고 그래 합니다. 뭐 별달리 할 게 있겠습니까. 일단 주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고 받는 사람도 그 마음 때문에 좋아할 텐데요.” “…….” “뭐, 봉도 여자니까 예쁜 액세서리 받으면 좋아할 거고, 꽃 받아도 좋아할 겁니다. 아니면 봉 오프날 입을 예쁜 옷 하나 해주셔도 좋을 거고, 사실 선생님이 주시는 거라면 뭐든 안 좋겠습니까. 근데요 선생님. 그냥 이런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이 봉을 그저 돌대가리가 아니라(이때 그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박재범은 개의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게 된 게 언제부터입니까? 무엇 때문에 봉을 다시 보게 되고, 마음에 두게 되셨습니까? 그때 그 마음을 되살려서 봉을 보시면 아마 선생님만이 해주실 수 있는 선물이 있을 거 같은데요.” 한껏 찌푸려진 채 있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보며 박재범 역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대충 적당한 거 하나 짚어서 사주시라고 얘기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그런 구태의연한 선물 품목을 나열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죽음이라는 가장 높고도 험한 산을 함께 넘었던 그들이다.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고맙다.” “아입니다. 제대로 대답도 못해드렸는데요 뭐.” 그날 저녁 박재범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가득 놓인 고추잡채와 깐풍기, 탕수육 접시를 앞에 두고 한껏 생색을 낼 수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이냐? 이야 이 많은 걸 대체 누가 쐈어? 다들 젓가락을 들고 정신없이 달려드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박재범은 어서 먹어들,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안 선생님, 이런 SOS라면 언제든 받아드리겠습니다!! ****** “선생님~. 저 왔어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들어서자 어둑하던 연구실 안이 따스한 빛으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평소 때보다 조금 더 지쳐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절로 입술 끝이 올라가는 것은 그녀도 어찌할 수 없었다. 남들처럼 손에 손을 붙잡고 하루종일 알콩달콩한 데이트는 바라지도 않았기에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몇 분 남짓한 그 잠깐 동안의 시간이 너무도 애틋하고 소중해서, 아무리 힘든 날이라도 그의 앞에서는 그냥 저도 모르게 웃고 마는 그녀였다. 그 역시 피로에 젖어 자신에게 포옥 안겨드는 가녀린 어깨를 토닥여주며 소파에 앉히고 늘 그랬듯이 우유며 간식거리를 꺼내다주었다. “아, 저 의국에서 방금 뭐 먹고 왔어요. 뭔 일인지 한 상 푸짐하게 차려져 있더라고요.” “그래?” “네. 그런데 아무도 누가 쏜 건지는 모르고…박 선생이 나서서 막 먹으라고 하는 거 보니까 박 선생이 쏜 것 같기도 한데 또 그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대체 누구지….” “누가 산 거면 어때. 다들 잘 먹었으면 된 거지.” “헤에…선생님이죠? 선생님이 간식 사다주신 거죠??”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조각 케이크가 담긴 상자를 열었고 그녀는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작은 승리감에 취해 싱글거렸다. 오늘은 상큼한 생크림 딸기케이크에 코코아파우더가 듬뿍 뿌려진 티라미스. 간식을 먹고 왔다던 그녀는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망설임없이 케이크 위에 1회용 플라스틱 포크를 푹 찔러 넣으며 눈 깜짝할 새 절반을 먹어치웠다. 저렇게 잘 먹는데도 살이 안 찌는 건 왜 그럴까. 본인은 날씬해 보이면 좋은 거 아니냐고 하지만 너무 연약해보여서 안쓰럽단 말야…. 그는 내일은 또 그녀에게 무얼 사다 먹이면 좋을까를 궁리하다가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던 작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과연 이걸 받고 기뻐해 줄까…. 딸기케이크를 다 먹어치우고 티라미스를 향해 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선물이야. 풀어봐.” 선물이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며 먹던 포크를 내려놓고 상자를 덥석 받아들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작은 액세서리라도 하나씩 선물해줄 걸 그랬다 싶어 살짝 미안해졌다. 그녀가 작은 상자에 예쁘장하게 묶인 연보랏빛 리본을 천천히 끌렀다. 달칵, 뚜껑을 열자 하얀색 솜 위에 곱게 놓여있는 것은 시리디 시린 은빛을 발하고 있는 수술용 메스였다. “선생님, 이건….” “그래. 내가 첫 집도할 때 썼던 메스야.” 비록 햇병아리긴 하지만 그녀도 외과의사다. 모든 의사들이 그렇겠지만 외과의에게 있어 첫 집도환자, 그리고 첫 집도 때 사용했던 메스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런 귀중한 것을 어째서 자신에게 주는 건지, 그것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갑자기, 생각이 났어. 그때…어머니 입원하셨을 때. 네가 죽어도 의사하겠다고 어머니 앞에서 악을 쓰던 그때 말이야.” “보고…계셨어요? 그걸?” “그래.” 딸자식이 자신을 낳아준 엄마 앞에서 죽어도 좋다며 악다구니를 해대던 그때. 그 무서운 수술을 또 할 거냐며, 또 가슴을 열 셈이냐며,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 일을 꼭 해야겠냐며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치던 엄마의 손보다도 엄마의 눈물 한 방울에 더욱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던 그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그때와 같은 상황이 또 닥친다면 그 이상으로 엄마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헤집어놓고 매정하게 등을 돌려버릴…나. 그녀는 순간 맺히는 눈물을 애써 참으려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냥 돌대가리로만 생각했는데, 여러 사람 죽이기 전에 빨리 관두는 게 사람 살리는 거라고, 그렇게 널 봤었는데…그때 어머니한테 울면서 소리 지르는 거 보고 생각했어. 아, 어쩌면 내가 본 게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그만큼 아팠던 만큼 더 좋은 의사가 될 지도 모르겠다. 정말 이 일이 아니면 안 된다고, 아픈 심장 부여잡고 저렇게 매달릴 정도면 한 번 정도는 봐줘도 되겠다, 라고.” “…….” “물론, 그 때는 이렇게 내 마음까지 다 줘버리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지만.” 배시시 그녀의 얼굴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자신을 향한 저 웃음 한번을 보기 위해 그토록 마음 졸였던 게 바로 엊그제 일만 같아 그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다시 한 번 오늘의 웃음을 마음속에 새겨 넣었다. 매일매일 가슴에 담아도 결코 채워질 줄 모르는, 그녀를 향한 갈증. 어제는 어제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내일은 내일대로…. 마음속에 수많은 칸을 질러서 매일 하나하나를 그녀의 미소로 채운다 해도 늘 모자라다고, 늘 목이 마르다고 외쳐대는 남자의 마음. “전에 얘기했었지. 내가 너의 20년 꿈을 죽였다고.” “선생님, 그건―.” “알아. 비록 지금은 네가 이렇게 돌아오긴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그저 널 잃고 싶지 않다는 내 욕심으로, 결과적으로는 널 살릴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네 꿈을 한순간 포기하게 만들어버린 것도 사실이니까.” “…….” “이건…내가 너한테 하는 약속이야. 다시는 네 꿈 포기하는 일 없게 끝까지 곁에 남아 있겠다고. 그저 나만의 봉달희가 아닌, 외과의사 봉달희로 끝까지 남을 수 있게 지켜봐 주겠다고. 물론 나만의 봉달희로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내가 좋아하게 된 건 끝까지 의사 하겠다고 바락바락 대들던 바로 그 봉달희니까.” 물론, 그 ‘봉달희’가 이렇게 부드러운 입술과 보드란 뺨과 황홀해질 정도로 향긋한 체취를 품고 있을 거란 건 미처 짐작도 하지 못했었지만, 이라는 말은 애써 삼키고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고요한 두 눈을 마주하며, 그는 조용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주는 거야. 몇 년, 몇 십년이 걸려도 좋으니까, 나를 뛰어넘어. 그때, 그 메스 돌려주면 돼. 뭐니뭐니해도 외과의사한테 첫 집도 메스는 일생의 보물이니까. 너니까 그 보물을 맡기는 거야. 알겠어?” 서랍 속 깊숙이 간직했던 메스를 꺼내 그녀에게 전해줄 상자 안에 넣으며, 그는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공부에만 매달렸던 그 옛날의 자신을 떠올렸다. 치졸한 복수라 해도 좋았다. 그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몰두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꿈속에서조차 외로움을 느끼는 것을 허락받지 못할 정도로 사정없이 스스로를 몰아칠 무언가가 필요했다. 사감(私感)이 섞이지 않고 그저 실력으로만 승부를 낼 수 있는, 온전히 자기 이름 석 자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선택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수술을 거듭할 때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기쁨을 느끼기는 했지만, 굳이 그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마음의 여유를 빼앗고 자신을 더욱 몰아붙이기 위해 그는 악착같이 일에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그래서였을까. 죽어도 이 일이 하고 싶다며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이 순간 마음 한 구석을 흔들었던 것은. 첫 집도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오른손에 쥔 피 묻은 메스가 발하는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따스하게 느껴지는 빛을 바라보았을 때의 그 알 수 없는 묘한 설렘과도 닮아 있던,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던 그 느낌. 아마도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아주 조금씩, 이제껏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마음속에 담게 된 것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동안 메스를 바라보던 그녀는 조심스레 상자 안에 메스를 집어넣고 뚜껑을 닫았다. 두 손으로 상자를 가슴팍에 소중히 모아 쥔 그녀가 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그가 일어서려 하자 그녀는 손을 내밀어 다시 그를 앉히고는 말했다. “흉부외과 봉달희,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몇 년 몇 십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마시고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안중근 선생님!” 아아, 그래. 내가 사랑한 너는 이런 사람이었지.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 이외에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 아직도 환자 한 명이 세상을 뜰 때마다 텅 빈 복도 한 구석에서 남몰래 울다가도 아직 숨을 쉬고 있는 또 다른 환자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는, 차마 잴 수조차 없는 한 생명의 무게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면서도 그래도 의사라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너. “선물, 고마워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받아본 선물 중에서 제일 기뻐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이런 귀한 선물 받고 안 기뻐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덕분에 저 엄청 자신감 얻었어요. 지금 상태라면 전공의는 물론이고 전문의까지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아요.” “무리해서 하라고 준 거 아냐. 초심 잃지 말라고 준 거지.” 그녀의 입술에 남아있는 딸기향을 느끼며 그는 품안 가득 그녀를 안았다. 아직도 마음속에서는 채 정리되지 않은 남자의 욕심이 소리소리지르며 날뛰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또 위험해질지도 몰라. 또 다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닥칠지도 몰라. 과연 그때에도, 냉정하게 다시 그녀의 가슴을 가르고 이미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그녀의 심장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 온몸의 피가 바싹바싹 말라붙을 것만 같은 그 고통을 다시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아? 할 수 없지. 목숨을 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매달리는, 그 절박한 마음까지 전부 사랑하게 되버렸으니까. 그녀를 사랑한다는 건 그만큼이나 큰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덕분에 그는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지,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꽁꽁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그녀의 웃음 한번에 언제 그랬냐는 듯 서서히 녹아내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껏 굳어있던 입가에 절로 미소를 머금게 되고, 같은 하늘 아래 그녀가 있기에 이제껏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꿈, 그리고 자신의 꿈. 그 둘이 함께 맞닿아 있기에 그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빛나 보이는 순간은 예쁜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하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니라, 피 묻은 수술복에 구겨진 가운을 입고 눈앞의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바로 그 순간이니까. 시간의 더께를 걷어내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순수를 일깨우는 그 모습에 어느덧 눈길을 주고 마음까지 주게 되었으니까. 난생 처음 그녀로 인해 맛보고 있는 매일 매일의 행복.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일생의 선물을 선사해 준 그녀에게 자신의 순수를 넘겨주며 그는 기억 속 첫 집도의 그 날을 떠올렸다. 앞으로 의사인 자신이 반드시 넘어야 할 수많은 벽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아득해져만 가는 머리를 애써 흔들고, 손에 든 메스를 꼭 쥐고 환부를 절개하던 순간 두 손을 적시던 붉디붉은 따스한 피. 두 번 다시 느껴보지 못할, 평생을 기억하고 되새기리라 다짐했던 첫 집도의 긴장과 설렘. 언뜻 보면 다른 것 같지만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과 너무나도 닮아있는 그때의 그 기분을 떠올리며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면서 재차 다짐했다. 끝까지, 곁에서 그녀와 함께 하겠다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녀의 꿈까지 사랑한다는 것이기에. FIN. (봉갤 업로드 시간 : 2007-05-22 10:42:09, Estel) '끄적끄적 > 그밖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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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봉달희] 악몽 [끄적끄적/그밖에]more.. 또 다시, 그 꿈이다.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혹시나 잠결에 그녀가 발을 헛디딜까봐 노파심에 켜놓은 침대 옆 미등이 방안을 비추고 있었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미등이 뿌려대는 약한 빛만으로도 네모난 천장, 자잘한 돋을새김 무늬가 뿌려진 크림색 벽지, 심플한 모양의 원형 벽시계, 그의 감색 블레이저 재킷과 그녀의 베이지색 점퍼가 걸려 있는 옷걸이, 그녀의 화장품 몇 가지와 약이 놓여있는 베드테이블의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바로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부러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다.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어깻죽지에 와닿는 숨결이 느껴졌다. 자신의 팔에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올려져 있었다. 따뜻했다. 그녀가 곁에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는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했다. 위도, 아래도, 왼쪽도, 오른쪽도 구별할 수 없는 마냥 새카맣기만 한 공간.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무시무시한 정적. 마치 심연우주(深淵宇宙), 중력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버린 우주공간이 주는 느낌이 바로 이럴까.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정작 어디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 자신, 단 한 사람만 존재한다는 것. 한번 풀쩍 뛰어올라 물구나무를 서면 하늘과 땅이 바뀐다. 뱅그르르 180도를 돌면 왼쪽과 오른쪽이 바뀐다. 이쪽이다, 라고 정해놓아도 비스듬히 3차원적으로 몸을 기울이면 기껏 익혀놓은 위/아래/좌/우/는 모두 뒤집혀버리고 만다. 방향을 짐작할 수 있는 표지는 그 어디에도 없다. 빛도 소리도 끝도 없이 무한대로 펼쳐진 공간. 눈을 감고 있으면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이 발을 적시고 다리를 타고 올라와 심장에 머무르며 핏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을 채우고 숨길을 막고 머리끝까지 흘러들어와 그를 집어삼킨다. 간신히 입밖으로 흘리던 신음소리마저 어둠에 완전히 잡아먹혀 버린다. 그는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아주 어릴 적부터. 누구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누구도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을 때에도 누구 하나 그를 이끌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제자리걸음을 하든, 앞으로 달음박질을 치든, 심지어 뒷걸음질로 물러설 때에도 누구 하나 그에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아―.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외마디 신음을 삼키며 그는 혼자 걸었다. 계속 걷고 또 걸었다. 걷다 보면 어딘가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 실제로 닿기도 했다. 걷다보니 손에 쥐고 싶은 것들도 생겼다. 그래서 이제는 뛰기 시작했다. 누가 어디로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역시 없었지만, 그는 혼자 찾아서 걷고 뛰었다. 조금씩 그런 과정에도 익숙해져갔다. 그래서 손에 넣고, 무언가를 이루기도 했다. ―기쁜가? 그런 것도 같았다. 살짝 웃음을 지으려고도 해보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가 손에 넣고 해낸 것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웃는 것을 보았다. 때로 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맞잡고 머리를 숙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면 자신도 조금은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숨 쉴 틈 없이 달려온 게 바로 이걸 위해서였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웃음을 뒤로 하고 또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며 웃었다. 덩달아 그도 조금씩 웃게 되었다. 이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행복이란 건 자신의 몫이 아니었기에 탐내려 하지도 않았다. 가끔씩 피로에 잔뜩 젖은 자신의 손을 누군가가 따뜻하게 쥐어주기를, 환자의 피냄새에 잔뜩 취해 있는 자신의 이마를 누군가가 부드럽게 쓸어주기를 바라본 적도 있었지만 그 역시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했기에 금방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그냥 아주 조금,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올 뿐. 그러나 그 꿈을 꾸고 난 날이면 어김없이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한없이 끌려들어만 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나지만 꿈속에서도, 꿈밖에서도 변함없이 혼자인 것을 재차 확인했을 뿐이었다. 두려웠다. 몇 번을 둘러봐도 혼자였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살가운 부름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한 마디면 되는데, 정작 그의 이름 석자를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날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보아도 끈질기게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어둠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이 대체 어디냐고, 어떻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어둠 속을 빠져나갈 수 있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만 가보아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음으로 그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이 암흑 속에서 자신을 건져달라고 말하고 기댈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그의 심연 속에 발을 들일 때까지는. “…우웅, …선생님…?” 이마에 달라붙은 갈색 곱슬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의 손길에 잠이 깬 모양이다. 잔뜩 잠에 취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다시 품안으로 파고들며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세게 잡으면 부러질 것만 같은 연약한 팔로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히 그를 자신에게 얽어놓으며 그녀는 잠결에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가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세를 고치며, 그는 간밤에 달뜬 숨을 삼키면서 그리도 애타게 연거푸 자신을 부르던 그녀의 입술을 살짝 매만졌다. “아직 아침 되려면 멀었어. 더 자.” “으응….” 지금도 그는 그 꿈을 꾼다. 동서남북을 가늠할 수 있는 별 하나 없는, 공기의 흐름마저 멈춰버린 절대고독의 어둠. 지금 딛고 서 있는 곳이 바닥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고 좌우를 짐작할 수 있는 기준점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나 넓고 깊은, 어딘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여전히 그는 혼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도 언제 어디에 있든 간에 결국에는 닿을 곳, 닿아야만 하는 곳이 생겼다. 생전 처음 그도 남들 같은 행복을 꿈꾸게 되었고 마음속에 소중히 품을 이름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있기에 그는 이제 길을 잃지 않는다. 그만의 절대좌표, 움직이지 않는 등대. 온몸을 적시고 숨통을 죄어오며 평생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암흑 속에서 그를 구원해주는 단 한 사람. “웅…같이 가요….” 그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떠올랐다. 무슨 꿈을 꾸는지 계속 입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리는 그녀를 다시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래, 이제 괜찮아. 끝이 없는 어둠을 보았기에 네가 품은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으니까.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을 겪었기에 나를 부르는 네 목소리를 누구보다도 잘 들을 수 있으니까. 차갑게 온몸을 타고 도는 지독한 외로움을 알기에 내 손을 잡는 너의 손이 얼마나 따스한지 느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네가 있기에 나는 방향을 잃지 않아. 네 덕분에. FIN. ========================================================================================= 등대,라는 표현에서 눈치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엑파 7시즌 중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디시 봉갤 업로드 시간 : 2007-05-16 23:47:12, Estel) '끄적끄적 > 그밖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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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봉달희] 감기 [끄적끄적/그밖에][외과의사 봉달희] 감기 처음 시작은 박재범이었다. 환절기 봄바람에 묻혀 지나가는 연례행사라며 코를 풀어대기 시작한지 만 이틀째에 결국 스테이션에서 ‘어이구야’ 외마디를 남기고는 풀썩 주저앉아버리는 바람에 이민우의 손에 질질 이끌려 당직실로 사라진 것이다. 엔스에이드를 챙기는 이민우 앞에서 ‘하여튼 골고루 한다니까, 정말.’이라며 볼멘소리를 내뱉은 것도 무색하게 그 다음다음날은 조아라, 그로부터 사흘 뒤에는 이민우 차례였다. 뭔 얘기냐 하면―. “다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연신 코를 풀고 기침을 하느라 여념이 없던 세 사람이 제각각 휴지뭉치를 들고 엉거주춤 일어나 그를 맞았다. 물론 그들을 등지고 EMR을 확인하던 그녀도 재빨리 일어나 그의 눈치를 살폈다. “자기 몸 제일 확실하게 챙겨야 할 사람들이 이게 뭐야 도대체?! 병동 전체가 니들 기침소리 때문에 온통 들썩들썩하잖아!! 다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죄송합니다. 내일까지 확실히 떼내겠…(콜록콜록콜록)….” “죄송합니…(쿨럭쿨럭쿨럭쿨럭)….” “니들이 그러고도 의사야? 그렇게 기침들 해가지고 어디 드레싱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자기 관리 하나 제대로 못할 거면 지금이라도 당장 집어치워!!”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고된 격무에 시달리는 전공의 생활. 특별한 운동을 하는 것도, 그렇다고 삼시 세끼 꼬박꼬박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는 것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도 저 멀리 말머리성운 어딘가의 이야기인지라 감기에 가장 취약한 집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되는 외과의들인 이상, 의사도 사람인데 감기에 걸릴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은 결국 자기 컨디션 조절에 실패했다는 변명일 뿐이다. 그렇기에 세 사람은 허리춤에 한손을 얹고 무섭도록 쏘아보는 그 앞에서 연신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은 기침을 하느라 제대로 굽히지도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발작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침 때문에 어깨를 들썩이는 세 사람 사이로 그녀가 눈을 깜박거리며 열심히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 정도면 됐어요, 선생님. 감기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의 양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녀의 텔레파시를 수신했다는 신호다. “이왕 걸린 건 어쩔 수 없고, 대신 다른 사람한테 더 이상 안 옮기도록 조심해. 알았어?” “조심하겠…콜록콜록콜록….” 대답 한 마디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하고 종일 기침 때문에 결리는 옆구리께를 부여잡는 와중에도 ‘다른 사람’에 유난히 힘을 주는 그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세 사람이었다. “히야, 봉…(콜록) 덕분에 살았네, 그자?(콜록콜록콜록)” “그러게. 호되…(콜록콜록)게 혼내키실 줄 알았어(콜록콜록).” “봉 선생, 미리 피해있어. 이러다 진짜(콜록) 봉 선생마저 감기 걸리면(콜록콜록) 우린 진짜 안 선생님 눈빛에(콜록) 홀랑 다 타버릴 거다(콜록콜록콜록).” “그래그래, 쪼 선생 말 맞다(콜록콜록). 저 어디(콜록콜록) 멀리 좀 가 있어라. 봉 선생 니까지 감기 걸리면 아이구야(콜록) 완전 프라이팬에(콜록) 깨소금(콜록) 볶듯이(콜록) 들들 볶일 거(콜록) 아이가(콜록콜록).” 그의 흰 가운자락이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참았던 기침을 한꺼번에 터뜨리며 쏟아내는 푸념 아닌 푸념에 그녀는 멋쩍은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그녀 몸 상태에 대해서는 당사자보다 몇 십배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였다. 동기들 말대로 그네들에게 감기라도 옮았다 하면 아마 더욱 강도높은 다크포스를 뿌려대며 세 사람을 몰아칠 게 뻔했다. 자기 몸도 몸이지만 세 사람을 위해서라도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 “대체 누구한테 옮은 거야? 박재범? 이민우? 조아라?” “아우, 선생님, 이제 그만하세요. 제가 제 몸 못 챙겨서 감기 걸린 건데 누굴 탓해요….” 인류가 세상의 모든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알고 있다 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감기다. 그의 호통이 스테이션을 뒤흔든 지 하루가 지나, 사흘 연속 야간당직을 섰던 그녀는 결국 39도 넘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평소보다 호흡이 거칠다고 생각한 그에게 그만 딱 걸린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가 보우하사 다행히 그녀의 이후 스케줄이 반나절 조금 넘게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굳이 싫다는 그녀를 거의 들쳐 메다시피 해서 그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물론, ‘다른 사람’한테 옮긴 죄로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그녀의 동기들에게 째릿하며 눈을 한번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맞지도 않는 자신의 파자마를 억지로 그녀에게 입히고, 사놓고 한번 써보지도 않은 새 전기요를 꺼내어 깔아놓고 온도를 한껏 올린 후 한사코 괜찮다는 그녀를 완력을 동원해 이불 속에 밀어넣었다. “저 괜찮아요. 아까 엔스에이드도 맞았고요….” “됐어. 감기엔 그저 푹 쉬고 자고 영양가 있는 거 실컷 먹는 게 제일이야.” “치이….” 그렇잖아도 열 때문에 부옇게 흐려져 오는 시야였지만 한껏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그의 얼굴만은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갑갑한 마음에 한쪽 팔을 이불 밖으로 살짝 내밀고 있으려니 금세 알아채고 다부진 손끝으로 턱 밑까지 꼼꼼하게 이불을 당겨 여며주는 그의 눈길은 그 언젠가 병실에 누워있던 자신을 바라보던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열 때문에 바싹 마르는 입술을 축이기 위해 물잔을 입에 대주는 손길마저 애틋해서 자신이 감기가 아닌 급성폐렴에라도 걸린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누가 보면 진짜 중병 걸린 줄 알겠어요. 그냥 감기일 뿐인데.” 베드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이내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을 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주는 그를 보며 그녀가 투정부리듯 말했다. 이렇게 열이 나는데 빨리 안 자고 뭐하냐며 버럭댈 반응을 예상하고 눈을 한번 찔끔 감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줄 뿐이었다. 한 마디 더 할까 하다가 손끝 발끝까지 저릿하게 아려오는 근육통에 그냥 눈을 감으려던 찰나,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아프지 마. 사소한 감기라고 해도 너 이렇게 누워있는 거, 다신 보고 싶지 않다.” 비록 오래 전이라면 오래 전이긴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그녀를 처음 발견했을 때 순간 그 어떤 생각도 판단도 내릴 수 없이 그저 두 발로 바닥을 딛고 서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때를. 하얀 침대 시트보다 더 새하얀 얼굴을 하고서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힘겹게 얕은 숨을 내쉬던 그녀를. 자신을 믿는다며 수술을 부탁하는 그녀의 청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혹여나 자신의 실수로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 없이 남은 시간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어야 했던, 온몸의 피가 마를 것만 같았던 시간, 시간들. 그럼에도 달아날 수 없는 지옥과도 같은 두려움 앞에서 한없이 떨어야만 했던 자신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때가 생각나는 바람에 한층 골이 깊어진 그의 양미간을 보며 그녀는 순간의 투정으로 그가 힘겨운 기억을 되새기게 해버린 자신을 자책했다. “…죄송해요….” “…눈 좀 붙여.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따끈한 전기요와 푹신한 이불 덕분이었는지, 이마를 따스하게 짚어주던 그의 손 덕분이었는지 그녀는 색색 고른 숨소리를 내며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열 때문에 간간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채긴 했지만 조금씩 열이 내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말대로 그냥 감기일 뿐이고, 그의 말대로 푹 자고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설령 환절기에 스쳐 지나가는 감기라 해도― ‘아픈’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전공의 생활이 힘들다면 그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줄 수 있었고 그 외의 다른 것들도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뒷받침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몸만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대신 아파줄 수가 없었으니까.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없는 단 한 가지였으니까. 그 사실이 못내 그를 괴롭게 했다. 그녀를 사랑하며 단 하나 아프고 힘든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 서너 시간 후 그녀는 눈을 떴다. 곁에 있겠다던 그가 방안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침대 밖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가 여며준 이불을 끝까지 얌전히 덮고 있느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열도 거의 내리고 온몸이 욱신거리던 근육통도 거의 사라져있었다. 방문을 열자 소파에서 논문을 보고 있던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좀 어때?” “이제 괜찮은 거 같아요. 땀을 실컷 흘렸더니 몸도 이젠 안 쑤셔요.” “갑자기 몸 식으면 다시 한기 들어.” 땀 많이 흘려서 씻어야 돼요, 라며 도리질치는 그녀를 억지로 품에 안아다 침대로 데려다 놓고 그녀가 입을만한 새 면티셔츠와 땀을 닦을 수건을 꺼내준 후 그는 그녀가 자는 사이에 마트에서 사들고 온 것들을 가져와서는 침대 위에 우르르 쌓아놓았다. 복숭아통조림, 귤통조림, 바나나, 사과, 방울토마토, 떠먹는 요구르트, 오렌지주스, 포도주스, 전복죽…. “선생님, 무슨 편의점 차릴 일 있어요? 뭘 이렇게 많이 사오셨어요?” “아플 때 사람마다 먹고 싶어지는 게 다 다르니까…. 일단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만 사봤어.” “에헷, 전 복숭아가 좋아요.” 그녀의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그는 벌써 복숭아통조림 한 캔을 따고 있었다. 순간 방안에 화악 퍼지는 복숭아향이 더없이 달콤했다.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라 그녀가 좋아하는 푸우 밥그릇에 담아서 내밀자 그녀는 그릇을 받아드는 대신 어미새에게서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새 마냥 입을 아 하고 벌렸다. “저 열은 내리긴 했지만 오늘 하루는 그냥 감기환자 할래요. 그러니까 기왕 해주시는 거 떠먹여주세요.” “말하는 거 보니까 다 나은 것 같은데?” 졌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그가 숟가락을 놀렸고 그녀는 한 입씩 잘도 받아먹으며 만족스런 웃음을 띠웠다. “이런 것도 좋네요. 감기 정도는 한 번씩 걸려도 좋을 거 같아요.” “차라리 먹여달라고 해. 감기 안 걸려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까. 아프지 마. 나도 안 아플 거니까.” “보통 거기선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 그런 대사가 나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선생님이 무슨 철인도 아니고 안 아파야지, 한다고 안 아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 그래도 앞으로는 안 아플 거야. 아플 수가 없어. 너 놔두고서는.” 그게 내가 널 사랑하고 지키는 방법이야. 네가 아픈 몫 떼어다가 대신 아픈 게 아니라, 너도 나도 아프지 않는 거. 너나 내가 아프기 전에 서로가 미리미리 챙겨봐 주는 거. 그렇게 둘이 오래토록 건강하게 같이 지내는 거. 그저 기쁘고 즐거운 기억으로 채우기에도 한없이 모자란데 아파서 힘들어하는 틈을 넣기 위해 그 귀한 시간들을 일부러 쪼갤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도 혹시나 네가 아프면 끝까지 곁에 함께 있을 사람은 바로 나니까. 그 어떤 순간이 오더라도. 그래, 내가 너의 가슴을 열고 네가 내 심장을 네 것으로 만들어버린 바로 그때처럼. 그래서 더더욱 아플 수가 없어, 너 때문에라도. 시원하고도 달콤한 복숭아 한 조각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 한 조각씩을 담았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으며 그의 마음을 한 입씩 받아 그녀의 것으로 만들었다. ―맛있어? 입안에서 녹아나는 부드러운 과육을 천천히 씹으며 빙그레 웃는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물었고, 그녀는 자신의 입술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그들이 함께 하는 또 하루가 저물어갔다. FIN. (봉갤 업로드 시간 : 2007-05-09 23:49:34, Estel) '끄적끄적 > 그밖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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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봉달희] 아침식사 [끄적끄적/그밖에][외과의사 봉달희] 아침식사 “세상에.” 입을 딱 벌린 채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그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뭐가?” “이건 사기예요, 사기라구요!” “그러니까 대체 뭐가?” “아무리 선생님이 아이큐 185에 천재외과의사라고 해도 이건 정말이지….” 이유모를 분함에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며 항변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프라이팬 모서리에 달걀을 톡톡 쳐서는 잘 달구어진 팬 위에 깨뜨렸다. 그것도 한손으로! 또래에 비해 부엌일이 손에 꽤 익은 편이었기에 이것만큼은 그의 앞에서 잘난 척을 할 수 있으리라 여겼던 자신감이 여지없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비키세요. 이제 제가 할 거예요.” “됐어. 아침부터 달걀껍질로 칼슘 보충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앉아 있어.” 실은 헐렁한 내 파자마 상의만을 걸치고서 부루퉁해 있는 네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침 댓바람부터 또 덤벼들 것 같으니까, 라는 말을 억지로 삼킨 채 부러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아침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였다. 따뜻한 아침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에 곤히 잠들어있는 그녀 몰래 24시간 영업하는 마트에 새벽녘 도둑고양이마냥 슬쩍 다녀왔다는 것도 비밀이다. 다행히 김치는 석주가 용케 챙겨다 준 게 있긴 했지만 천하의 안중근도 제대로 된 밑반찬을 냉장고에 미리 갖춰놓을 정도는 아니었던지라 마트에서 만들어 파는 반찬 몇 가지를 사들고 와야 하는 수모 아닌 수모를 감수해야 하긴 했으나, 어쨌든 중요한 건 방금 삐삐거리며 요란스럽게도 밥이 다 됐다고 알리는 밥솥에서 따끈한 밥을 퍼내서는 손수 끓인 국을 옆에 놓고 그녀와 머리를 맞댄 채 아침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 그녀와 함께. 오늘 끓인 국은 시원한 무국이다. “국도 끓일 줄 아세요?” “옛날에 종종 해봤어. 고아원에서는 아무래도 손이 모자라니까. 원장님이나 다른 분들 바쁘면 애들 끼니 챙기는 건 머리 좀 큰 애들 몫이지. 대학 때 자취하면서도 밥은 곧잘 해먹었고. 손 많이 가는 복잡한 거 아닌 담에야 간단한 건 요리법만 보면 대충은 다 할 수 있어. 원래 손재주가 없는 편도 아니고.” 아 예, 어련하시겠어요…. 샐쭉해지는 그녀를 향해 한번 피식 웃어주고는 그는 다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국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옛날 고아원 시절 딱히 끓일 국거리가 없어 난감해하실 때마다 ‘할 수 없다!!’라고 외치며 한 솥 가득 끓이시던 원장선생님의 비장의 무기. 제철인 무를 잘게 채썰어 한 냄비 가득 붓고 자작하게 물을 부어 푹 끓이고 소금으로 간하는 것만으로도 시원달콤한 무즙이 우러난 맛있는 무국이 된다. 미간 사이를 모으고 국을 한술 떠먹어 본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국그릇에 국을 담고는 그 위에 깨소금을 살짝 뿌리는 것으로 완성. 그새 수저를 챙겨놓고 밥을 퍼 담아놓은 그녀 앞에 살며시 국그릇을 가져다 놓았다. 소금과 후추를 뿌린 달걀프라이에 쇠고기 장조림, 멸치볶음, 보기에도 먹음직한 빨간 양념이 듬뿍 배인 배추김치, 도시락용 김 한 봉지. 그가 식탁 의자에 제대로 앉기도 전에 그녀는 국 두어 숟갈을 연거푸 떠먹더니 바로 밥을 푹 떠내서는 국물에 슥슥 말기 시작했다. “맛있어?” “엄청 맛있어요! 국물도 진짜 시원하구요.” “반찬은 아무래도 사온 거라 맛이 좀 덜할 거야. 네가 이해해라.” “에이 무슨 말씀. 맨날 병원 구내식당에서 다 식은 밥 허겁지겁 먹다가 밥솥에서 금방 한 밥 먹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에요 감동!” “그렇담 다행이고.” 연신 숟가락을 놀리는 품새를 보니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아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음…. 워낙 오랜만에 끓여본 거라 제대로 맛이 날까 했는데 무 상태가 좋았던 모양인지 국물 맛이 그럭저럭 괜찮았다. 눈이 마주치자 한번 방싯 웃고는 다시 먹는데 열중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절로 배가 불렀다. “봉달희.” “―우에?” 입안 가득히 밥 한술을 떠 넣고 국물을 후루룩 떠마시던 그녀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아마도 예? 라고 말하려던 것이겠지. 순간 피식 배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갈무리하고 그가 입을 열었다. “봤지? 내가 아침 차리는 거.” “네. 깜짝 놀랐어요. 이거 남들 알까 무서운데요. 천하의 TS 안중근 선생님이 한손으로 달걀 프라이에 무국….” 말하기만 해봐, 특히 박재범한테. 그녀 말대로 안중근이 부엌에 드나든다는 것이 알려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말도 많고 좁기도 좁은 병원 바닥에서 어떻게 사실이 각색될 지가 더 문제였다. 특히 그 박재범의 입담을 통해 전해진다면…. 온몸으로 내뿜는 경고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그녀는 금세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네네, 알아요, 안다니까요. “그러니까….” “네.” “…아니다. 식겠다. 밥 먹어.” 연신 숟가락과 젓가락을 움직이던 양손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다시 날렵하게 쇠고기장조림 한 조각을 집어드는 동시에 밥 한 숟갈을 입안에 가득 떠넣었다. 가짓수가 얼마 되지 않는 반찬 앞에서도 신나게 밥 한 공기를 비워내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금방이라도 입밖으로 나올 것만 같은 말을 물 한 모금과 함께 삼켰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도 네가 애써 밥 차려주려고 종종거리지 않아도 돼. 밥이든 뭐든 너보다 시간여유가 있는 내가 다 하면 그만이니까. 넌 그냥…내가 차린 밥상에 와서 같이 앉아있으면 돼. 지금처럼 같이 먹어주기만 하면. 나 혼자가 아닌, 우리 둘이서 함께. ++++++ 다 먹은 그릇을 씻어 건조대에 엎어두고, 남은 반찬도 냉장고에 집어넣는 등 대충 주방 정리를 끝낸 후 두 사람은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하나씩 들고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뜨거운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한 그녀가 잔을 내려놓고는 그의 입술을 두드렸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환영의 의사를 밝혔다. 부드러운 그녀의 혀와 입술이 달콤하게 휘감기는 아득한 느낌과 함께 쌉싸름하면서도 향긋한 원두커피 향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아침, 잘 먹었다는 인사예요.” “새삼스럽긴. 인사치고는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에헷, 그런가요?” 느긋한 오프날의 아침에 나누는 키스는 한결 여유롭다. 늘 시간에, 일에 쫒기는 그들에게 있어서 실로 소중한 시간. 시선을 맞추고, 목언저리의 맥박을 느끼고, 살구빛 뺨에 얼굴을 부비고, 그녀의 체취를 한 가득 마음에 담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니까. 이제껏 사랑이란 걸 제대로 받아본 적도, 주어본 적도 없는 내 곁에 네가 있는 것만으로도 넘칠 것 같은 기쁨이니까. “저기, 하나 여쭤봐도 돼요?” “…응?”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이마며 갈색 머리카락 한올 한올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던 그가 느릿느릿 반문했다. “음식도 곧잘 하시면서, 왜 게는 못 발라 드신다고 하셨어요? 그때 울릉도로 저 찾으러 오셨을 때요. 설마 대게 한번 드셔본 적이 없진 않을 테고 말이죠.” 이게 문제다, 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한가운데 직구를 던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것도 전심전력을 다해 받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그래서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들릴 듯 말 듯한 한숨을 작게 내쉬며 그는 그녀를 더욱 품에 꼭 안았다. “그런 건 보통…혼자서는 안 먹잖아.” “네?” “그런 음식은 보통 여럿이서 먹으러 가지 않나? 친구나, 가족이나….” “그렇죠, 보통은? 1인분만 팔기엔 좀 어중간하니까.” “그래서야. 굳이 그런 걸 먹으려고 같이 갈 사람도, 가고 싶은 사람도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너 말고는.” “…….” 다시 눈자위에 살짝 갖다 댄 입술에 느껴지는 낯선 감각. 그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는 그녀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어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찬찬히 닦아주었다. 그렇게 울 만한 얘기도 아닌데. 토닥토닥 어린아이를 달래듯 어깨를 감싸 안으려는 그의 손을 마다하고 그녀가 똑바로 앉아 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선생님, 저랑 약속 하나 해요.” “뭔데?” “앞으로 혼자 마트가서 장보는 일 없기. 앞으론 꼭 둘이 함께 가는 거예요? 저요, 이래봬도 꽤 음식 잘해요. 병원에서야 선생님 보시기에 실수연발이라 조금 불안할진 몰라도요. 달걀껍질 씹을까봐 걱정 않으셔도 된다고요.” “…….” “그리고 혹시 뭐 바깥에서 드시고 싶은 거 있음 저한테도 꼭 얘기하기. 물론 비싼 거라면 선생님이 좀 사주셔야겠지만요. 하여튼 앞으로는 밥도 꼭 둘이서 같이 먹기예요.” “…….” “약속, 해주실 거죠? 하신 거예요?” 그는 그냥 그녀를 꼭 끌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돌대가리, 언제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간 거야? 내가 속으로 혼자 중얼거리다 삼켜버린 말, 그새 다 들어버린 거야? 그래서 그렇게 대답해주는 거야?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그가 마음속에 품고만 있던 것을 먼저 이야기해주었고,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고, 이끌어주었던. 그녀가 있기에 그의 비어있던 마음 한 구석이 온전히 채워져 충만해지고, 그녀 덕분에 그는 비로소 남자 안중근이 되어 그녀를 온 몸 온 마음으로 감싸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이, 함께. 흔하다면 너무나 흔하지만 이제껏 그에게는 그토록 힘겨웠던 그 낱말들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면 이렇게나 달콤한 주문이 되어 그를 나락에서 건져 올린다. 그래, 이 모든 것은 네가 있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지 몰라도 내게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일이었던 것들이, 네가 있기에 하나하나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내가 마시던 컵과 함께 나란히 놓여있는 너의 컵, 건조대에 나란히 엎어져 있는 나와 네가 사용한 그릇들, 그리고 조촐하지만 네가 있어 따뜻한 아침식사…. 고마워. 이렇게 또 새로운 것들을 알게 해줘서. 고마워. 이렇게 또 소중한 것들을 선사해 줘서. 고마워.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해준 너라는 존재에. …그래서, 너를 사랑해. FIN. (디시 봉갤 업로드 시간: 2007-05-05 23:18:31, Estel) '끄적끄적 > 그밖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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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사 봉달희] 마법 [끄적끄적/그밖에][외과의사 봉달희] 마법 “선생님, 찾으셨….” 말 한 마디를 채 끝맺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은 그에게 점령당했다. 미리 밝혀두자면, 이건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다. 5시간에 걸친 폐암 환자 수술을 끝내자마자 갑작스런 TA 응급환자 수술까지 연이어 마친 후 내심 ‘힘드셨죠?’라며 생글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맨 먼저 보길 바랐는데 정작 당사자는 동기들과 함께 한손에는 자판기 커피를, 한손에는 초콜릿을 들고 그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우르르 몰려나갔던 것이다. 젠장, 우리가 서로 얼굴 못 본지 8시간이 넘었단 말이다!! ―8시간이면, 세상에 하루의 1/3이 아닌가!― 그래, 억지라는 건 인정한다. 다들 똑같이 하얀 가운에 하늘색 수술복을 입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가운데서 그녀가 자신을 한눈에 알아보고 달려와 주기를 바란다는 건…. 아니, 생각해보면 억지는 아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 그녀의 존재를―심지어는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까지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가 남들보다 얼굴이 더 새하얗고, 남들보다 더 날씬하고, 남들보다 더 예쁘고, 남들보다 더 반짝거리고…. 하여튼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눈에 확 뜨이는 것도 있겠지만, 언젠가 작정하고 엑스레이를 찍어보면 심장 옆에 자신도 모르는 새에 ‘봉달희 자동인식센서’가 붙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보다도 마음이 먼저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채고 움직일 수가 있냔 말이다. 키스는 마법과도 같다. 말로 미처 표현하지 못한 것들도 키스 한번만으로 쉽게 전달할 수도 있다. 보고 싶었어. 우리 무려 8시간 넘도록 못 봤었잖아. 그새 별일 없었지? 아픈 데는 없었어? 밥은 먹었나? 어디 또 멍들거나 하지는 않았고? 입밖으로 내고픈 말은 많고도 많은데 그녀의 미소짓는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은 그저 하얗게 변해버릴 뿐. 그럼에도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안다. 그것이 바로 마법. 성급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입술을 차분히 달래며 작고 가냘픈 두 손으로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감싸고는 천천히 어루만진다. 한껏 집중할 때 저도 모르게 깊게 골이 패었다가 사라지는 미간 사이를, 미세한 혈관 하나 조직 하나를 놓칠까 부릅뜨고 있었을 두 눈을, 그의 신념만큼이나 높고 곧게 뻗은 날렵한 콧날을. 얼굴 위를 스치는 손길 한번 한번마다, 주고받는 숨결마다 그는 온몸에 쌓여있던 피로와 긴장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돌대가리, 내가 힘들게 불러낼 것 없이 기다렸다가 이렇게 해주면 좀 좋아…. 싸구려 인스턴트 분말에 질 낮은 커피크림이 더해진 자판기 커피의 기름진 맛조차도 그녀의 입술을 통해 맛보고 있노라면 금방 로스팅한 원두를 갈아 뛰어난 바리스타가 정성껏 드립한 최고급 원두커피인 것 마냥 향기롭기 그지없었다. 이것 또한 마법이라면 마법, 오직 그녀만이 선사할 수 있는. “달다….” “에? 정말요? 카카오 함량 높은 거라서 오히려 쓸 텐데? 그 왜 요즘 유행하는 거 있잖아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그녀가 못내 사랑스러워 그는 다시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쓰다니, 그럴 리가. 99% 카카오 함량의 초콜릿, 진하디 진한 에스프레소는 물론이거니와 제 아무리 쓰디쓴 한약이라 해도 그 입술로 옮겨준다면야 몇 십번이고 몇 백번이고 삼킬 수 있는 것을. 사실 달콤한 게 어디 입술뿐이겠는가. 하얗게 빛나는 이마와 깊은 두 눈, 조그만 코, 발그스름하게 상기된 복숭아빛 뺨, 섬세하게 뻗은 목덜미에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소담스런 어깨, 그리고…. ―PPPPPPPPP. 자신의 심장 옆에 ‘봉달희 자동인식센서’가 있다면 그녀의 호출기에는 ‘키스타임 방해센서’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 분위기라도 잡을라치면 5분을 못 넘기고 요란스레 울려대는 저 소리라니. 하긴 지금같은 경우라면 차라리 호출기가 울린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눈부신지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의 고리를 오늘 하루가 다 가도록 못 끊었을 지도 모르니까. “가봐야겠어요.” 배시시 웃으며 품에서 벗어나려는 그녀의 두 손을 그가 다시금 붙잡았다. 여차하면 부러질 것만 같이 가늘기만 한 이 손으로 오늘도 그녀는 몇 명의 환자를 돌보고 오더를 내리고 발작을 진정시키고 CPR을 하며 환자를 살려내겠지…. 경건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정중히 입맞추는 그를 보며 그녀가 조금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주문이야. 우리 돌대가리가 오늘도 실수 한번 하지 않고 무사히 환자들 살필 수 있게 해달라는 주문.” “치이…. 선생님 눈엔 아직도 돌대가리로 보여요? 왜 그때처럼 카디악 탐폰도, 베타블로커도 모르는?” 샐쭉 입을 내밀며 뾰로통한 척 하긴 하지만 붉게 상기된 얼굴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미소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럼, 돌대가리고 말고. 내가 어떤 심정으로 너를 지켜보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너를 사랑하는지 짐작도 못 하는 돌대가리…. 할 수만 있다면 하루 24시간 내도록 옆에 앉혀놓고 오직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으나 그녀는 그가 사랑하는 여자 봉달희이자 의사 봉달희였고, 그 역시 남자 안중근이자 그녀가 존경해마지 않는 의사 안중근이었기에 오늘도 그는 잠시 동안의 키스로 남자 안중근의 욕심을 애써 달래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그녀를 위한 주문이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한 부적과도 같았다. 한동안 또 그녀를 보지 못할 동안 안절부절 못할 자신의 심장을 잠시나마 달래기 위한, 그나마도 점점 그 효력을 발휘하는 기간이 짧아지는 바람에 걱정인 부적. 아쉽게 손을 놓는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팔랑거리며 문간으로 종종종 뛰어갔다. “조심하고 다녀. 어디 또 부딪치지 말고.” “네엡~!!” 장난스럽게 거수경례까지 하며 눈앞에서 사라지는 그녀를 다시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그는 잠시 전까지만 해도 호흡을 주고받던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키스는 간구(懇求). 입술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몸 안에서 흐르는 마지막 피 한 방울, 내쉬는 짧은 숨결마저도 단지 그녀라는 이유 때문에 이토록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키스는 기원(祈願). 오늘 하루도 그녀가 몸도 마음도 아파하는 일이 없기를, 눈물 흘리게 되는 일이 없기를, 아무 사고없이 그 빛나는 미소를 머금은 채 무사히 하루를 마칠 수 있기를. 키스는 다짐. 그녀가 힘겨워할 때 어깨를 빌려주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나로 인해 더 많은 기쁨을 얻고 내가 네게 남아있는 슬픔을 다 가져갈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제까지나 곁에서 함께 하리라는. 그녀는 알까. 키스 한번에 이렇게나 많은 소원을 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모른다 한들 어떠랴. 중요한 건 그녀가 내 곁에 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며,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키스 한번에 이렇게나 간절한 마음을 담을 수 있다는, 그녀가 내게 가르쳐 준 최고의 마법. FIN. (디시 봉갤 업로드 : 2007-05-03 23:16:16, Estel) //으하하 이러고 놀았단 말이지;; '끄적끄적 > 그밖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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