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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모텐슨 - 해당되는 글 6건
2008/12/23   게리 올드만  (8)
2007/06/11   비고 씨  (2)
2006/06/20   아저씨 문답(아싸)  (8)
2006/03/12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혹은 폭력의 일상 
2005/11/26   비고 몰텐센(Viggo Mortensen)-빠져들지 않을 수 없어 
2005/11/26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Return of the King)-그들은 그렇게 돌아왔다 
게리 올드만 [창고/사랑해마지 않는 그들]

예전에 소루 님이 쓰셨던 [폭력의 역사] 리뷰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비고는 자신이 모르는 인물이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인물을 자기 고유의 모습으로 구현하려고 한다.’ 소루 님 못지않은 비고 빠로서 나 역시 그 말에 적극 공감한다. 이 사람은 어떤 역을 연기해도 ‘비고 모텐슨’ 배우 본연의 이미지가 깔려 있달까…. TV 시리즈를 제외하고 적어도 국내에서 구해볼 수 있는 비고 씨 출연작은 어지간히 챙겨봤다고 생각하는데, 그 작품들 속에서 비고 씨가 연기하는 캐릭터들은 어딘가 모르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역할을 제대로 이해/소화해내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소루 님이 얘기하신 그대로 ‘비고가 연기하는 인물은 비고’ 이 말이 딱 정답인 듯. [G.I.제인]의 존과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과 [퍼펙트 머더]의 데이빗과 [프로페시]의 루시퍼와 [데이라잇]의 로이(후…;;)를 돌이켜보라. 이건 비고 씨의 외모적 특징에서 어느 정도 기인하는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이 사람이 연기하면서 지향하고자 하는 지점이 그런 부분에 있는 것 같다. 분명 영화 속 한 인물을 연기하고 있음에도 그는 ‘비고 모텐슨’이라는 배우의 자아 역시 지니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비고 모텐슨이라는 사람 안에 그렇게나 많은 페르소나가 존재할 수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주어진 역할에 대해서 완벽히 파악한 연후에 또 다시 자신만의 색채를 덧씌움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느낌, 영화 속 인물과 비고 모텐슨이라는 실존인물이 융합되면서 일어나는 기묘한 화학변화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럼 비고가 연기하는 스타일과 좀 상반되는 입장의, 즉 배우 자신의 이미지를 종처럼 찾기 힘든 경우는 또 어떨까 생각해봤는데 내 경우 딱 생각나는 인물은 바로 게리 올드만이다. 게리 올드만에 대한 사전지식이 별반 없는 상태에서 [불멸의 연인]의 베토벤과 [레옹]의 부패경찰 스탠필드가 같은 배우라고 했을 때 단박에 ‘아, 그렇구나’라고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생각하는 게리 올드만은 철저히 자신을 버리고 캐릭터에 올인하는 스타일의 배우다. 비고 모텐슨과 나란히 놓고 봐도 그가 갖고 있는 존재감이 오히려 나았으면 나았지 절대 못하지는 않고, 배우 자신의 개성이 없는 것도 아닌데(오히려 지나치게 개성적이라면 개성적이랄까) 신기하게도 나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를 볼 때마다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곤 한다.  








조각같은 미남인가 하면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 눈에는 미중년인 게리 올드만 씨


워낙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이니만큼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실력이야 100% 보장하지만 역시 게리 올드만은 악역을 맡았을 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렬함이 무엇보다 돋보인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깊이를 알 수 없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건 ‘깊다’를 강조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알 수 없다’라는 부분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트루 로맨스], [레옹], [일급살인]에서의 게리 올드만을 떠올려보라. 철저한 악역이라기보다는 좀더 종잡을 수 없고 복잡다단한 악역을 능수능란하게 연기한다는 점에서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가 선(善)보다는 악역의 이미지에 좀 더 걸맞다는 것도 인정한다([배트맨 비긴즈]에서 게리 올드만이 ‘착한’ 역이고 ‘죽지도 않는다.’고 지인들에게 누차 얘기했건만 결국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_-). 그러나 그런 배우가 [드라큐라]에서는 드라큐라이고 [주홍글씨]에서는 아서 딤즈데일이고 [배트맨]에서는 고든이란 거다. 아서 딤즈데일과 고든의 얼굴에서 게리 올드만이 연기했던 악역들의 그림자를, 아니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의 느낌을 찾아낼 수 있는가?(난 전혀 찾을 수가 없다.) 그가 출연한 영화의 스틸컷을 죽 나열해봐도 분명 ‘닮은 얼굴’이기는 하지만 조금의 공통점도 찾아낼 수가 없다. 팬심의 차이인가? 글쎄, 그건 아니라고 본다. 배우 자체의 존재감을 죽이고 캐릭터에 전부를 바치면서도 역시나 능수능란하게 얄미울 정도로 완급을 조절한다. 나름 비중있는 조연이기는 했지만 결국 주연은 아닌 상황에서 그가 크리스찬 베일 앞에서 철저히 그 자신을 낮추었던 것처럼.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가 지닌 그릇과 고든이라는 영화 속 인물이 지닌 그릇 중 그는 철저히 고든의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 거기 존재하는 것은 그저 고든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몰입하게 되는 게리 올드만의 연기는 바로 그 부분이다. 처음엔 분명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를 보기 위해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영화 속 그가 연기한 특정 인물의 이미지만이 남아 있고 그 이미지들은 각각 별개의 기억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간다.

비고 모텐슨과 게리 올드만이 출연하는 영화를 단지 그들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도 보러가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비고 모텐슨의 경우 그가 만들어내는 그만의 캐릭터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고, 게리 올드만의 경우 그가 몰입하는 영화 속 등장인물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 간에 그들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다.

결론→[이스턴 프라미스] 보러가고 싶었는데 결국 공쳤다. OTL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역시 비고 빠;




미중년, 비고 모텐슨

2008/12/23 11:01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8
비고 씨 [일상/보고, 듣고,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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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흙바닥에 나뒹굴며 얻어터지고 코뼈가 나갔어도 내 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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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모텐슨

2007/06/11 22:18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2
아저씨 문답(아싸) [일상/문답놀이]
아저씨 문답-AMAGIN 양

길어서(당연하지 않습니까!!) 가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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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년, 비고 모텐슨, 제레미 아이언스, 케빈 베이컨

2006/06/20 23:17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8
폭력의 역사(A History of Violence)-혹은 폭력의 일상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주의: 스포일러 가득입니다. 영화가 정식 개봉하면 이 감상문은 수정될 수 있습니다.

감독: 데이빗 크로넨버그David Cronenberg (2005)
주연: 비고 몰텐센Viggo Mortensen (톰 스톨Tom Stall)
        마리아 벨로Maria Bello (이디 스톨Edie Stall)
        에드 해리스Ed Harris (칼 포가티Carl Fogarty)
        윌리엄 허트William Hurt (리치 쿠색Richie Cusack)
        애쉬튼 홈즈Ashton Holmes (잭 스톨Jack Stall)
        피터 맥닐Peter MacNeill (보안관 샘Sheriff Sam Carney)


Tom Stall had the perfect life...until he became a hero.



[폭력의 역사] 포스터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위의 포스터가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 같다. 자신에게 들이댈지도 모르는 총구 앞에서, 불안한 표정의 아내를 뒤로 하고 선량한 시민 톰 스톨은 아무런 동요없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살짝 떠올리고 있다. 이 한 장면으로, 톰 스톨이라는 인간이 폭력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폭력을 어떻게 제어하며 자신의 폭력성을 어떻게 감추어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밥먹듯이 살인을 일삼는 이들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레 표현된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보고 울먹거리는 어린아이를 달래고 도닥이며 등 뒤에서 권총을 꺼내드는 남자와, 삐뚤어진 의자를 바로 하고 더운 날씨를 불평하며 여행 가방을 챙기는 남자는 분명 동일인물이지만, 그는 잘잘못을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는 폭력이 생활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톰 스톨은 어떠한가? 마치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한 소시민이다. 한밤중 악몽을 꾸고 울어대는 딸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고, 아침식탁에 앉아서는 아들의 학교생활을 세심히 챙기며 물어봐주고, 출근하는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를 잊지 않고 건네는 남자. 비록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자기 가게를 갖고 열심히 하루하루를 꾸려가는, 밤이 되면 사랑하는 아내를 품에 안고 충만한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살인같은 끔찍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늦은밤 가게에 들어온 2인조 강도를 물리친 톰 스톨은 일약 미국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자기 가게에서, 그것도 아직 손님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고 함께 일하는 종업원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는 강도 앞에서 내재되어 있던 정의감과 용기를 십분 발휘하여 그야말로 완벽하게, 순식간에 강도 두 명을 사살한다.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저토록 침착하게 강도를 무찌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느끼는 것도 잠시, 병원에서 채널마다 자신이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것에 질린 채 그만 TV를 꺼버리는 톰 스톨을 보면서 그의 아내는(그리고 관객도), 그가 예상치 못한 살인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과 같이, 혹은 더 나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며 이제 그만 가족과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토로하는 그는 여전히 따뜻하며 선량한 시민이고 이웃이고 남편이며 아버지이다.

자신을 다룬 뉴스가 미국 전역으로 방송된 직후, 칼 포가티라는 갱단의 보스가 톰을 찾아온다. 그는 톰 스톨은 자신이 알고 있는 조이 쿠색이 확실하며, 예전의 생활을 버리고 평범한 시민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어떻게 ‘톰 스톨’이 잔인한 갱단의 킬러 ‘조이 쿠색’과 동일 인물일 수 있겠는가? 그저 가족과, 이웃과, 일터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것에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인데 말이다. 그렇기에 자기를 ‘조이’라 부르며 매일같이 찾아오는 갱단을 두려워하고, 혹여 가족들이 다칠세라 다친 발을 절뚝거리며 집까지 정신없이 뛰어오는 이가 바로 톰 스톨이다. 자신을 위협하는 동급생을 때려눕힌 아들을 야단치다 저도 모르게 따귀를 날리고서는 안타까워 하는 이가 바로 톰이다. 그러나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던 갱단을 태연히 때려눕히고 권총을 갈겨대는 이도 바로 톰 스톨이다.

욕설과 구타와 같은 폭력은 일상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신을 괴롭히는 바비를 두들겨 팬 잭은 이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아버지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하더라도 잭은 결국 살인자가 되버리고 만다. 폭력이란 그런 것이다. 애써 멀리하다가도 한번 발을 들이고 나면 목을 죄어오는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와도 같은, 모두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그런 것. 폭력은 ‘휘두르는’ 데서 시작되지만 결국은 ‘휘둘리는’ 것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톰의 경우는? 그는 자신의 폭력성을 감출 줄 안다. 스스로 통제할 줄 안다. 순간적으로 폭발시킬 줄도 안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올 줄도 안다. 딸아이를 감싸안던 손으로 갱의 목을 후려갈기고, 아내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에 차가운 권총을 들고서 망설임없이 눈앞의 상대를 겨냥한다. 톰 스톨과 조이 쿠색, 둘의 인격을 가진 것도 아니다. 둘은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고, 상황에 따라 자신의 성향을 철저히 조절했을 뿐이다. 아마 그 2인조 강도가 아니었다면 톰은 죽을 때까지 가족과 함께 폭력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아니, 아마 앞으로도 그는 하고자 한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미소지으며 살아갈 것이다. 톰은 먼저 폭력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언제라도 자신을 자극하는 것을 물리치고 없애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게 가능한 것이 바로 조이 쿠색, 톰 스톨이니까.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어떠한가. 남편이 한때 갱단의 킬러였고 그의 과거 역시 모두 거짓투성이였음을 알면서도, 그 모든 것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 사람임을 알게 된 이디는 분노하고, 톰은 아내의 분노에 역시 폭력으로 응답한다. 따스한 온기와 애정으로 가득 차 있던 영화 초반의 베드신과 달리, 서로의 뺨을 갈기다 결국 몸안에서 차오르는 욕망만으로 계단에서 엉키는 둘의 섹스, 그로 인해 이디의 등에 길게 남은 상처 자국은 그들의 생활이 앞으로는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등의 상처는 언젠가는 낫겠지만, 이디는 이제 남편 톰을 볼 때마다 조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한다면, 여전히 완벽한 남편이자 아버지인 톰 스톨로 남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이디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형의 저택에 있던 이들을 몰살하고는 강물에 피묻은 몸을 씻는 그의 목에는 여전히 은빛 십자가가 걸려 있다. 톰은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고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 평온한 생활을 위협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그는 망설임없이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그게 바로 아들 잭을 비롯한 평범한 이들과 톰의 차이점이다. 분명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 게다. 톰, 아니 조이에게도 잭처럼 폭력 앞에서 공포에 떨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고 살인을 저지른 후 온몸에 묻은 피비린내에 괴로워했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익숙해지다가, 무뎌지다가, 어느새 자기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영화의 타이틀인 ‘폭력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친형과 그의 부하들을 죄다 죽이고 돌아와 저녁식탁에 앉는 톰의 얼굴은 괴로움에 조금씩 일그러져 가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이디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던 나도 진정 그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지, 어쩌면 그 모든 게 역시 그가 제어하는 폭력과도 같은 것인지 혼란에 빠지고 만다.

조이를 버리고 톰 스톨로 다시 태어나기까지 3년이 걸렸다며, 이디를 만나고 나서야 진정한 톰 스톨이 되었다고 눈자위를 적시며 말하는 톰과, 자신을 조이 쿠색으로 부르는 칼 포가티 앞에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톰과, 친형의 정수리를 날려버리는 톰…. 이 모든 인물을 한꺼번에 담아내는 비고 몰텐센의 연기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따스하게 미소짓던 눈빛은 눈 한번 깜박이는 것만으로 냉혈무도한 킬러의 눈으로 돌변한다.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그의 연기는 마치 톰 스톨이 그랬던 것처럼 적정 수위를 유지하며 ‘폭력의 역사’라는 원색적인 제목의 영화를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내게 한다. 톰으로 인해 빚어지는 불안과 의혹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마리아 벨로와, 저마다의 존재감으로 제 위치를 지키고 있는 에드 해리스와 윌리엄 허트도 정식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요즈음 개봉 영화의 러닝타임에 비하면 다소 짧은 90여분 남짓한 시간이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영화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다. 부디 삭제없이 무사히 큰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꼬리>제일 중요한 것. 비고 씨의 미모는 숙성된 오크통의 양주마냥 너무나도 고혹적이어서 보는 사람을 단번에 KO시킨다. ㅠ_ㅜ


2006. 3. 12.


비고 모텐슨

2006/03/12 21:40 | 관련글(트랙백) 1 | 댓글 0
비고 몰텐센(Viggo Mortensen)-빠져들지 않을 수 없어 [창고/사랑해마지 않는 그들]
1998년도던가요. TV에서 해주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G.I.제인G.I.Jane]의 데미 무어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영혼Ghost]에서의 몰리, [세븐 사인The Seventh Sign]에서의 애비 퀸,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의 헤스터의 이미지가 한데 뒤섞여 있던 제게 있어 머리를 삭발하고 정글에서 뒹구는 데미 무어의 모습은 참 신선한 충격이었죠.

그런데 웬일입니까. 분명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데미 무어였습니다. 그다지 유쾌하게 볼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밉살스럽다고 말하는 교관 잭, 저는 그 사람이 이상하게도 참 좋아보이는 겁니다. 야간훈련 때 조던의 손을 놓아버린 코테즈에게 삽을 던지며 ‘전우라는 단어를 먼저 배워라.’라고 나직하게 경고하는 교관 잭. 생존훈련에서 가차없이 조던을 폭행하다 결국 훈련을 통과하고 자신에게 욕지기를 내뱉는 조던을 바라보는 잭의 시선. 상점에서 물건을 사갖고 나가는 조던을 유리창 너머에서 바라보던 잭의 눈빛…. 네, 한 마디로 ‘필이 꽂혔다.’라는 거겠죠. 분명 가혹하고 냉정한 교관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공정하고 사려깊은 사람.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의 첫 이미지는 그랬습니다.

우연일까요. [크림슨 타이드Crimson Tide]의 웹스 역시 잭의 이미지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진 해크만과 댄젤 워싱턴 사이에서 핵미사일의 발사키를 쥐고서 고뇌하는 그의 모습 역시 군인으로서 따라야 할 명령체계와 인간으로서 따라야 할 도리 사이에서 중도(中道)를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죠. 친구 댄젤 워싱턴에게 보여주던 따스하고도 유머러스한, 한편으로는 잠수함의 계기판의 붉은 불빛 아래서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심하던 모습. 과격한 행동이나 급진적인 결단을 내리지는 않지만 신중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깊게, 인상이 남았습니다.

비고 몰텐센이 연기한 대부분의 인물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라는 것이죠. 위의 [G.I.제인]이나 [크림슨 타이드]는 물론이고 기네스 팰트로, 마이클 더글러스와 함께 나온 [퍼펙트 머더A Perfect Murder]에서도 그랬습니다. 기네스 팰트로와 마이클 더글러스 둘 모두를 속이고 사기를 치면서도 데이빗(비고 몰텐센)은 기네스 팰트로의 사진을 간직합니다(결국은 어이없이 칼 맞고 죽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위험한 매력, 하지만 어딘가 숨어있는 순수함과 천진함. 이런 이미지는 [베일 속의 카이로Ruby Cairo]에서도 비슷합니다. 아내 앤디 맥도웰에게까지 자신이 죽었다고 믿게 한 다음 대규모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결국 자신이 벌여놓은 사기극의 덫에 걸려 역시 총을 맞게 되지만요. -_- 남편이 자신을 속인 것을 알게 된 앤디 맥도웰은 그를 원망하지만 완전히 뿌리치지는 못합니다. 남편의 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앞서 말한 영화들과 함께 못 말리는 알코올 중독자로 나오는 [28일간28Days], 자신감으로 가득 차서 의기양양하게 나섰다가 어이없이 죽는 [데이라잇Daylight](정말 어이없습니다. 비고 몰텐센이 나온다는 이유로 이 영화를 보시려는 분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총격전에 휘말려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데다 마약중독에 빠지는 랄린 역을 연기한 [칼리토Calito's Way] 등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참으로 가지각색입니다. 하지만 비고 몰텐센을 통해 표현되는 캐릭터는 대부분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 왠지 시선이 머물게 되는 사람, 그러다 결국 마음을 뺏기고 마는 사람입니다([여인의 초상The Portrait of Lady]에서 왜 니콜 키드먼이 비고 씨를 뿌리쳤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요-_-). 비록 그 비중은 작지만 영화의 전개에서 중요한 고비를 담당하는 역할이죠. 주위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인력의 소유자. 그런 이미지가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가 원래 지닌 인간적인 면모인지, 아니면 그런 캐릭터를 잘 연기해 낸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역할을 맡든 간에 그 캐릭터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배우라는 것입니다. [위트니스Witness]에서 대사 몇 마디 없던 젊은 농부로 영화에 데뷔했던 그때는 해리슨 포드의 옆의 옆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던, 비록 잠시 스쳐 가는 조역에 불과했지만 그는 차곡차곡 영화의 무게중심을 잡는 데 필요한 캐릭터로 자리매김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LotR』에서 아라곤이라는 메인 캐릭터를 맡아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요. 원작에서 이실두르의 후계자이자 곤도르의 왕인 고귀하고도 자신감으로 가득 찬 아라곤 텔콘타르에서, 보다 인간적이고 섬세하지만 자신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경계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인간들의 왕으로 거듭나는 아라곤은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에 의해 완벽하게 스크린 속에서 현실화되었습니다.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와 영화 속 아라곤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죠.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비고 몰텐센은 화가이자 사진작가, 시인으로도 이름이 꽤 알려져 있습니다. [퍼펙트 머더]에서 데이빗의 그림과 사진이 비고 몰텐센의 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유명한 에피소드이고, [G.I.제인]에서 D.H.로렌스의 시를 인용하는 장면은 비고 몰텐센이 직접 리들리 스코트에게 그 장면을 넣자고 제안했다고 하지요. 『LotR』의 DVD 서플먼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안 맥켈런, 크리스토퍼 리에 못지 않게 동료 배우와 스태프·감독에게 배우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은 배우이기도 합니다. 연기에 대한 열정,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소화해 내기 위한 극진한 정성. 주위 사람들을 자신에게 몰입시키는 묘한 힘과 카리스마.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반전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당당함.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역할을 여럿 맡아왔음에도 매너리즘이나 비슷비슷한 느낌이 아닌 매번 새로운 인물의 새로운 매력을 창조해낼 줄 아는 배우로서의 묵직한 존재감. 그의 사진이나 그림, 시에서 엿보이는 풍부한 예술적 감성. 이 모든 것은 비고 몰텐센이라는 배우에게 그가 실제로 갖고 있는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이, 이제 『LotR』의 아라곤을 뛰어넘은 또 다른 그의 자리를 다져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꼬리> 크리스토퍼 워큰과 함께 나온 [The Prophecy]를 아직도 못 봤습니다. T_T 어디서 구할 수 있을런지.


비고 몰텐센 : imdb.com

2004.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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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년, 비고 모텐슨

2005/11/26 22:53 | 관련글(트랙백) 0 | 댓글 0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Return of the King)-그들은 그렇게 돌아왔다 [창고/영화볼 땐 조용히]
감독: 피터 잭슨Peter Jackson (2003)
주연: 일라이저 우드Elijah Wood (프로도 배긴스Frodo Baggins)
이안 맥켈런Ian McKellen (간달프Gandalf)
비고 몰텐센Viggo Mortensen (아라곤Aragorn)
숀 오스틴Sean Astin (샘와이즈 '샘' 갬지Samwise 'Sam' Gamgee)
빌리 보이드Billy Boyd (페레그린 '피핀' 투크Peregrin 'Pippin' Took)
도미니크 모나한Dominic Monaghan (메리아독 '메리' 브랜디버크Meriadoc 'Merry' Brandybuck)
올란도 블룸Orlando Bloom (레골라스 그린리프Legolas Greenleaf)
존 리스-데이비스John Rhys-Davies (김리Gimli)
미란다 오토Miranda Otto 에오윈(Eowyn)
버나드 힐Bernard Hill 세오덴(Theoden)
데이빗 웬햄David Wenham 파라미르(Faramir)
존 노블John Noble 데네소르(Denethor)
숀 빈Sean Bean (보로미르Boromir)
이안 홀름Ian Holm (빌보 배긴스Bilbo Baggins)
케이트 블란쳇Cate Blanchett (갈라드리엘Galadriel)
휴고 위빙Hugo Weaving (엘론드Elrond)
리브 타일러Liv Tyler (알웬 운도미엘Arwen)
앤디 서킨스Andy Serkis (스미골-골룸Gollum)


2001년부터 매년 12월을 잠 설쳐가며 극장으로 달려가고픈 마음에 발만 동동 굴러야 했던 긴 기다림이 드디어 올해 그 끝을 맺었다.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 길고 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진정한 인간들의 왕으로 돌아온 아라곤과,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로만 보였던 호빗들이 당당한 발걸음으로 샤이어에 돌아오는 그날. 그리고 이 땅에서 안식을 찾지 못한 프로도가 힘의 세 반지의 소유자와 함께 발리노르로 떠나는 그날. 그토록이나 보고 싶었건만 한편으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그 뿌듯함과 허탈함이 한데 뒤섞인 묘한 감정이란!

아이고 왕님T_T[왕의 귀환]에서 진정한 '왕의 귀환'은 대관식에서의 아라곤이 아니라, 아라곤이 사자(死者)들을 이끌고 펠렌노르 평원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그가 팔란티르와 나르실의 정당한 상속자이며, 그가 지니고 있는 바라히르의 반지는 분명 그가 엘렌딜과 이실두르의 후손이며 곤도르의 왕좌에 오를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그것을 본 자라면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절대적 징표이다. 그러나 막상 엘론드가 손수 갖고 온 안두릴을 받아들면서도 곤도르의 왕이라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망설이던 아라곤은, 곤도르와 Middle-Earth의 인간들의 운명을 구원하기 위해 진정한 왕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한다. 사자의 길에서 안두릴을 휘두르며 스스로의 정당성을 설파하는 아라곤은 단순히 로한의 에오메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라손의 아들 아라곤'이라고 자신을 설명하던 때와는 다르다. 곤도르의 왕의 명령만을 받들었지만 이실두르를 배반함으로써 오랜 세월을 자책과 회한 속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쳐야만 했던 사자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할 수 있는 유일한 자. 그의 신하 보로미르가 그토록이나 소망했던 백색탑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사람. 신화와 전설이 아스라한 추억과 함께 저편으로 사라지고 네냐·빌랴·나랴 세 개의 힘의 반지의 소유자들이 발리노르로 떠난 후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Middle-Earth를 아우를 수 있는 자…. 그 누구도 범접하는 것을 허락치 않던 사자들이 안두릴과 그 앞에 머리 숙이고 백색탑으로 달려오는 순간―. 그의 친구들과 백성들과 반려가 함께 한 영광되고 축복된 대관식은 아니라 해도, '왕의 의지'로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그 순간이야말로 아라곤 텔콘타르가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왕의 귀환]의 아라곤 못지 않게 보는 이를 감동케 하는 이들이 있다. [왕의 귀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반지원정대]의 레이디 갈라드리엘의 말 한 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서로들 반지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던 그 상황에서 비록 자신없어 하면서도 반지를 모르도르까지 갖고 가겠다고 일어선 호빗 프로도. 프로도가 반지의 유혹 앞에서 흔들릴 때마다 굳은 의지로 그를 지키고 보호한 충직한 샘와이즈. 각각 로한과 곤도르의 기사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영광을 얻은 메리와 피핀. 여자라는 이유로 늘 성 안에서 다른 이들을 보살피는 데 만족해야 했던 공주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장에서 위치킹을 쓰러뜨린 강인한 에오윈 공주. 그 누구도 그들에게 그만큼의 임무도, 의지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마음 안에서 빛나고 있는 진정한 자신을 찾아 그 빛에 의지해서 가시밭길을 헤쳐간다. 프로도의 손 안에서 빛나던 에아렌딜의 별빛은 비록 갈라드리엘의 선물이긴 했지만 급박한 순간에서 마지막 희망 한 자락을 놓지 않았던 호빗 프로도 배긴스의 의지의 산물이다. 그들은 남들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역할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대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을,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향해 발을 내딛었고, 비록 쓰라린 고통을 감수할지언정 결국에는 원하는 것을 거머쥐었다. 왕좌, 명예, 부….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제각기 꿈꾸던 자그마한 행복,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고 그런 작은 힘들이 결국은 Middle-Earth를 구해낸 것이다. 특히 처음부터 비교적 비중이 컸던 프로도와 샘에 비해 시작은 미미했던 메리와 피핀은 [왕의 귀환]에서 그 누구보다도 빛나는 인물이다.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직접 해낼 수 있는 것은 비록 작은 것이었지만, 메리와 피핀은 그 마음속에 누구보다도 큰 용기와 우정을 품고 있었다. 함께 자란 친구, 공유하고 있는 따스한 고향의 기억, 같이 나눠 피우던 담뱃잎의 냄새…. 작지만 소중한 것들을 끝까지 간직한 메리와 피핀은 그 용기로 인해 반지 전쟁의 중요한 한 막을 차지하게 된다.

[왕의 귀환]에서 또 하나 돋보이는 부분은 바로 공포와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이다. 공포에서 달아나서 몸을 보전하려는 일시적인 안위가 아니라 한계가 있음을 알고서도 끝까지 가볼 수밖에는 없다는,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 그것이 어떤 희망이나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공포에 '직면해서' 얻어낸 결론이라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세오덴은 절대적으로 그들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선두에서 적진을 향해 뛰어들고, 간달프와 피핀은 성문이 무너지고 오르크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그 순간에 평화로운 정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짓는다. 그들은 '이겨야만 한다'라는 생각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아 있으니까, 살고 싶으니까, 살아서 다시 한번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으니까! 세오덴은 에오윈에게 나라를 잘 다스려야만 한다는 등의 왕으로서의 충고는 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서 지금처럼 웃어다오, 그것뿐이다, 라고. 계속해서 선조의 과오에 대한 죄의식과 그처럼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려오던 아라곤은 '난 죽음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며 사자의 길에서 그 모든 것에 정면으로 맞선다. 블랙 게이트 앞에서의 아라곤의 연설은 그가 지금까지 겪은 두려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승리에 대한 확신이나 희망으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살고 싶다는 인간의 마지막 절규이다. 엘다르의 영생을 누리는 엘프들의 삶이 아닌, 언젠가는 끝을 맞이하기에 더 치열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삶.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도 안다. 어쩌면 그들에게 '내일'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것은 '내일'이 아닌 바로 '오늘'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싸우고, 피를 흘리고, 사랑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다.

아름답고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미나스 티리스의 대관식에 뒤이은 따스한 샤이어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슴을 울컥하게 하는, 대관식에 전혀 뒤지지 않는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1년여의 시간이 흘러 다시 돌아온 호빗들의 고향은 예전처럼 떠들썩하고 시원한 맥주와 담배연기가 함께 어우러진 변함없는 모습이다. 맥주 한 잔씩을 들고 탁자에 둘러앉은 호빗들이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던 그때. 정말로 많은 일들을 겪었고, 위험한 상처를 입었지만 훌쩍 성장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그들이 그 순간 무슨 말을 나누어야 할까. '수고했다', '잘 했어', '좋았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작고 보잘 것 없지만, 그들은 결국 1년 전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뜨리며 술잔을 부딪친다. 그들은 정말로, 샤이어에 '돌아온' 것이다.

놀랄 정도로 훌쩍 커버린 호빗들 못지 않게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김리이다. '요정들에게 반지를 넘겨줄 수 없다!'라며 도끼를 휘둘러대던 호전적인 그는 어느새 그토록이나 경멸하던 요정 레골라스를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이며 그의 옆에서 싸우는 것에 흡족해한다(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갈라드리엘 마님의 살인미소의 위력이 지대했음은 무시할 수 없다).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일관하며 투덜대던 김리는 그만의 소탈함과 솔직함으로 무겁게 가라앉는 전장의, 그리고 영화의 분위기를 다시 본궤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죽은 줄 알았던 메리와 피핀을 보며 볼멘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한편, 블랙 게이트 앞에서 레골라스와 조용히 미소를 주고받는 그의 모습은 긴 여정을 통해 나누어 온 원정대원들간의 우정과 사랑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혹자는 골룸에게 그리도 쉽게 속아넘어가는 프로도를 답답하게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골룸을 향한 프로도의 연민과 동정은 바로 그 자신을 향한 것이다. 절대반지가 없었다면 평범한 호빗의 삶을 살다 평화롭게 죽어갔을 스미골의 삶은 절대반지의 유혹 앞에서 철저히 무너지고 만다. 악의 정수, 절대권력의 원천이자 힘의 세 반지를 비롯한 모든 반지들을 아우르는 유일무이의 절대반지. 위대한 현자인 간달프와 갈라드리엘마저도 그 유혹을 두려워했건만 선과 악이 늘 공존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범인(凡人)들은 오죽했으랴. [왕의 귀환] 도입부의 스미골과 디골의 다툼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에서 무너지고 마는(혹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나약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골룸을 보면서 반지에 매혹된 자의 말로를,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골룸의 모습에 비추어 짐작하는 프로도. 그런 그가 어떻게 골룸에게 매몰차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Aiya Eärendil Elenion Ancalima!그러나 만약 프로도가 점점 강해져만 가는 반지의 의지와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고 발걸음도 당당하게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면, 나는 이렇게나 『LotR』(책, 영화 모두)에 열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결국 반지의 힘에 굴복한다.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며 운명의 산까지 다다른 것도 그의 의지였지만, 마지막 순간에 반지를 손에 낀 것 역시 그의 의지이다. 그래서 실망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다. 그것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다. 제 아무리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계속되는 유혹을 당당히 뿌리친다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의 판단의 기로에서 조금이나마 더 선한 쪽, 옳은 쪽에 가까운 쪽을 선택하며 그 선택에 대한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동정이든, 넓은 아량이든 간에 결국 프로도는 골룸을 끝까지 증오하는 대신 반지에 함께 사로잡힌 동병상련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결국은 골룸 덕분에 반지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화염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한 미소를 띄우던 골룸이나, 그만큼의 대가를 치른 후에야 비로소 샘을 바라보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프로도. 누구나 유혹에 빠질 수 있고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완벽한 프로도 배긴스가 아니어서, 나는 그것이 참 고맙고 또 가슴아프다.

위치킹의 칼에 당한 상처는 끝내 낫지 않았고 그는 결국 발리노르로 떠나는 길을 택한다. 또 다른 여행, 모험?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절대반지는 처음부터 호빗 프로도 배긴스가 이겨낼 수 없는 고난이자 무겁기 그지없는 '짐'이었고,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로, 나중에는 유혹에 빠져 반지에 한때 묶여 지내야 했던 시간의 대가로 영원한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그런 그에게 발리노르에서나마 긴 안식이 허락될 수 있다면, 그것이 비록 정든 고향과 평생을 함께 할 친구들과 헤어지는 슬픔을 겪어야 할지라도 떠나는 그를 어떻게 원망할 수 있을까. '레드북'의 뒷장을 샘에게 맡긴 채 배에 오르는 프로도와 그런 그의 고통을 이해하며 말없이 전송하는 메리와 피핀, 그리고 샘. 이제야 정말로, 긴 원정의 끝에서 작별을 하게 된 그들에게 발라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빈다. 그리고 반지원정대원들 못지 않게 긴 여정을 무사히 끝마친 영화 『LotR』의 연기자와 스태프 모두에게도.

꼬리1> 이왕 이렇게 된 거, 피터 잭슨!! [RotK] 확장판 빨리 내주오!! 레골라스만 예뻐하지 말고 곤도르 섭정가도 좀 예뻐해 달란 말예요!! T_T
꼬리2> 아직 두 번밖에 안 봤기 때문에 지금 이 감상문은 앞으로도 수정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2003.12.28.


반지의 제왕, 비고 모텐슨, 아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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